(79)해방에서 환국 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그러나 우리들의 놀라움은 얼마 안 가서 패전의 타격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일개 상인으로서 용감하게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조카의 믿음직한 생활력과 그 젊음에 넘친 「에너지」에 대한 강한 감명으로 변해갔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들만 하더라도 남의 일을 놀라며 보고만 있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먹고사는 일은 그만두고라도 우선 앞날에 대한 불안감에 아무데나 의지할 곳만 있으면 의지하려던 참이라, 우리들은 곧 그 처세법을 견학하러 나섰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변했습니다마는 당시는 아직도 폐허 그대로인 서쪽 모퉁이에 「바라크」 큰 건물의 시장이 서 있고 그 중간쯤에 우리는 간신히 조그마한 집을 찾아내었습니다.
멍해서 바라보는 우리들을 재빨리 발견한 이건공 부처는 『어머나, 어서 오십시오. 자, 이리 들어오십시오.』
적이 당황한 태도였으나 곧 상냥하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 익숙한 접대솜씨에 내실 감탄하면서 명물인 단팥죽(시루꼬)을 대접받았는데 건공 부처는 『종전으로 인해 궁내성에서 주는 생활비는 줄어드는 형편이고 하인들의 앞날도 생각해야 겠어서 이왕이면 그 사람들의 손으로 장사를 시작하여 차차 발전을 꾀해 보려는 생각에서…』라고 서로 그들의 동기와 포부를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위에 마침 그때 획기적인 금융 조치령이 공포되어 얼마 안 되는 「신원」과의 교환으로 「구원」은 모두 봉쇄되어 신원의 매력이 절대적이었던 때인지라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려 「모모야」(도옥) 라는 점포를 벌여 가끔 부처가 직접 점두에 나서서 「서비스」를 하고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건공 비 「요시꼬」(가자)전하는 나의 숙모 「마쓰다이라·도시꼬」(송평준자)님의 맏 따님으로 태어나 소화 6년에 우리들과 집 어른의 누이동생 덕혜님과 마찬가지로 소위 「내선일체」의 본보기를 보인다는 취지아래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이 「마쓰다이라·도시꼬」(구성은 나베시마=과도)님은 전쟁 중 항공부인회 회장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을 맡아본 남성적인 부인이었으므로 그들의 피를 물려받은 「요시꼬」님도 여간 활발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연령도 젊고 또 전쟁 중에 모든 재산을 태워버렸으므로 그만큼 두뇌의 전환을 하는데도 빨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장래 생활설계에 대해서 이건공으로부터
『전하께서는 어떤 계획을 하고 계신지요』하고 물어왔을 때 우리들은 섬뜩하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그때까지 이렇다할 대책을 세우고 있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아니 대책을 세우려 해도 이런 혼란한 속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다만 앞길이 캄캄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이 물결 속에 흘러갈 밖에 없는 가보오.』 집 어른은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중얼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어수선한 기분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시부야」역전 혼잡한 길을 헤치고 갔던 탓인지 나는 어떤 사람과 맞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깜짝 놀라서 몸을 피하는 순간
「정신 차리지 못해….』
어딘가 전지에서 곧 돌아온 듯 텁수룩한 군복차림의 그 청년은 나를 노려보며 이렇게 호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용감스럽게 생활전선에 나섰던 이건공 부처는 얼마 안 가서 「시루꼬야」 (팥죽집)도 걷어치우고 「요사꼬」님은 은좌에서 「바」(술집)의 「마담」이 되었다고 하더니 곧 이어서 이혼 설이 떠돌아서 너무나 의외의 일이라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의 각 신문과 잡지에는 「사양의 왕족」이니 무어니 하여 그들 부처의 이야기가 자주 났는데 한가지 질색은 조선의 실정과 이 왕가의 내막을 잘 모르는 일반 일본민중들은 우리들과 건공 내외를 혼동하여 마치 우리들이 그런 일을 당한 듯이 어쩌구저쩌구 하고 떠들어대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