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 칼럼

외교적 큰소리와 경제적 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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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요즘 기세 좋은 외교적 큰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편으론 대견스럽고 한편으론 몹시 걱정된다. 우리도 이제 강대국을 상대로 이렇게 큰소리를 칠 만큼 컸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과연 이래도 괜찮을까 하는 조바심이 있기 때문이다. 큰소리 뒤의 쓴 기억이 너무나 많다.

오랜 역사적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광복 후만 하더라도 바깥 사정을 잘 몰라 많이 당했다. 한국전쟁 직전 북쪽이 전쟁 준비를 다 끝내놓은 형편인데도 국방부 장관이라는 분은 만약 북쪽이 쳐내려오면 즉각 반격에 나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도록 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북의 남침이 시작되자 수도 서울은 사흘 만에 무너지고 급하게 한강 다리를 끊는 바람에 애꿎은 백성들만 죽을 고생을 했다.

옛날 어느 외무부 장관은 영국과 일전불사(一戰不辭)를 외치기도 했다. 가까이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전의 큰소리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 정말 기고만장했다. 어느 일본 각료가 망언을 하자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면서 만약 그 장관을 갈지 않으면 정상회담에 참석지 않겠다고 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당시는 매우 시원하고 인기도 올라갔다. 일본 쪽은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그렇게 큰소리를 쳤으면 아쉬운 소리를 안 해야 당당하고 또 체면이 선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동남아 통화 파동이 났고 날로 다가오는 외환위기를 막기 위해 부총리가 일본에 달려가 긴급지원을 호소해야 했다. 그때 일본의 대답은 IMF의 틀 안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하겠다는 지극히 사무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몰랐지만 이미 미국과 일본은 한국을 요리할 밑그림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열 받는다.

미국에 대해서도 매우 당당했다. 그해 가을 자동차 협상을 하면서 한국이 하도 세게 나오니 미국은 수퍼 301조를 발동, 보복하겠다고 나왔다. 그러자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고 맞섰다. 협상 대표는 우리는 미국에 대해서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고 큰소리쳤고 그 당당함으로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 친구들을 좀 잃어버렸다. 미국은 한국의 기세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기회가 되면 한 번 손을 보기로 작심했던 것 같다. 좋을 땐 괜찮아도 큰 어려움이 닥치면 평소의 적공(積功)과 좋은 친구가 아쉬운 법이다.

통화 파동이 날로 심각해져 한국이 정말 국가 부도를 걱정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도 아쉬운 소리를 해봤지만 국민소득 1만 달러나 되는 한국을 1000달러밖에 안 되는 중국이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는 치욕스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IMF에 긴급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IMF 지원의 열쇠는 미국과 일본, 특히 미국 백악관이 쥐고 있다. 당시 대통령은 평소 미국 대통령과 친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해 12월 한국에 대한 지원 여부를 놓고 백악관에서 전략회의가 열렸는데 재무장관은 한국이 정책 운용을 잘못한 걸 충분히 알게끔 냉정한 조처를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무장관은 전통적 우방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국방장관은 한반도의 안정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을 강력히 주장해 격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마지막에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지원키로 결단을 내려 가혹한 조건 아래 IMF 체제 속에 들어갔고, 그래서 외환위기를 수습한 것은 잘 아는 일이다. 그러나 큰소리치는 버릇은 또 나와 "IMF 사태는 완전히 극복되었습니다"하고 성급히 선언하는 바람에 그 뒤 무척 고생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다행히 이번은 외교 강공 속에서도 한.일 정상회담을 안 하겠다는 소리도 없고 한.미 공조의 틀은 굳건히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우리와 같이 생각해 주느냐가 관건이다. 특히 진영 외교의 틀에서 벗어나겠다든지 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든지 하는 말은 잘못 오해될 수 있다.

이제 우리도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가질 만큼 컸지만 미국과 일본은 초경제대국이다. 그들의 협조와 도움은 항시 필요하다. 1997년처럼 경제위기는 늘 올 수 있다. 새 친구를 만드는 것은 좋으나 오랜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은 정말 곤란한 일이다.

최우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