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언론 미 지하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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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에는 6백만의 독자를 자랑하는 2백여 종류의 지하신문들이 나날이 그 영향권을 넓혀가고 있다.
고작해야 「옵세트」인쇄로 「태블로이드」판이긴 하지만 흑인「슬럼」가나 「멕시코」계 등 미국의 소수족 사회, 가난한 백인사회 뿐 아니라 번져 가는 반전감정의 물결을 타고 군대 안 까지 지하신문들은 미국 전역에서 미국인들에게 파고 들어가고 있다.
이들 지하신문들의 보도영역은 「레닌」·모택동주의·흑인운동·여성해방운동으로부터「로크·뮤직」·「섹스」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아무 거침이 없다.
이 신문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특출하고도 중요한 측면은 이들이 모두 미국 「저널리즘」의 금과옥조라고 할 「객관성」을 가볍게 내동댕이치고 있는 도전성이다.
미국 「저널리즘」은 기자(필자)가 다루는 어떤 문제와 관련하여 주관을 개입시키는 것을 금기로 삼고있다. 그러나 지하신문들은 이와는 정 반대이다. 지하 신문은 사건을 일어난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일어나게 만드는데 사명이 있다. 즉 기자나 필자는 먼저 행동자 이어야 하며 기사를 쓰는 일은 그 다음에 오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
한 지하신문의 편집자는 오늘날의 상업신문들이 「사건」과 「사실」을 연결짓지 못하며 독자가 자신들의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하지·지들이 성행하고 있는 것은 미국사회가 극단주의 (극우나 극좌) 화하고 이에 대한 억압이 가중해 가는 현실에서 젊은 세대나 도회인들에게 돌파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지하지들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있으며 기자들도 월급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신문을 계속 발행하기 위해 다른 직장에서 돈을 번다. 많은 저명한 작가나 유명한 만화가·기자들이 익명으로 기고하는 것이 보통이다.
지하신문은 「마을의 소리」역할을 하기 위해 55년쯤에 나타났다. 66년에는 기껏해야 5개의 신문이 5만여 독자를 갖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과 같이 비약(?)한 것은 그만큼 자유미국의 사정이 일부 사람들에게 돌출구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복잡하고 숨막혀가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는지 모른다.<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분 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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