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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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45년 8윌 15일-이날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는 날이었다.
그보다 먼저 「나스」(나수) 별장에 가있던 영친왕비는 동경의 공습이 더욱더 심해가고「히로시마」에는 필경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이우공이 폭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번에는 동경에 떨어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도 더「나스」에 있을 수가 없었다.
『구야, 어서 동경으로 가자. 아버님 혼자서 계실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어 못 견디겠다.』
이리하여 방자 부인은 아들 구씨를 데리 동경으로 돌아왔는데 자동차가 도중에서 고장을 일으켜 초만원이 된 혼잡한 기차를 타고 오느라고 여간 고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동경에 들어서니 그처럼 시끄럽던 공습의 「사이렌」소리도 들리지를 않고 거리의 분위기가 의외로 고요하므로 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아까사까」(적파) 왕저에 도착하였다.
『전하!』
하고 왕 전하가 계신 방으로 들어가니 영친왕은 무엇인가 침통한 안색으로 「라디오」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방자 부인과 아들을 보자
『조용히 하오. 지금 옥음 방송이오.』
옥음 방송이라 함은 천황이 방송을 한다는 뜻이다. 이윽고 「라디오」에서는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연합국 측에 항복한다.』는 천황의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소위 「대 일본제국」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보다 먼저 일본 궁중에서는 항복 문제를 둘러싸고 연일 연야 어전회의가 열리고 지금 항복하는 것이 일본이 사는 길이라는「화평론자」와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워야 한다는 「강경파」가 서로 대립하여 필경 「아나미」(아남) 육군대신과 「스기야마」(삼산) 참모총장은 할복 자살하고 이에 격분한 청년장교들은 천황이 미리 취입해둔 「옥음 방송」의 「레코드」판을 빼앗으려고 궁성 내로 침입하여 근위 사단장을 죽이고 「스즈끼」(영목)수상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난동을 부렸다.
그러한 경과 있던 만큼 그때의 일본천황의 방송은 더 한층 침통하였고 또 박진한 맛이 있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방송을 듣고있던 영친왕의 두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방자 부인의 눈에서도 눈물이 샘솟듯 했다. 그리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그저 흐느껴 울었다.
『필경 일본은 패전했다.』
영친왕은 만감이 교착하여 한참동안은 다만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소위 옥음 방송을 듣고 처음에는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일반 민중이 가엾게 생각되었고 패전의 구렁텅이에서 그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까를 동정하였으나 차차 흥분이 가라앉아 이번에는
『나는 대체 누구이며 또 나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생각이 불연듯 일어났다.
일본사람도 한국사람도 아닌 자기, 모든 권위와 배경이 없어진 자기-생각하면 실로 전도가 암담하였다. 영친왕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자리를 떠서「베란다」로 갔다. 그리하여 잿더미가 되고 황무지가 된, 동경시가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때에 눈물어린 두 눈에 영국식의 커다란 건물이 하나 뛰어들어왔으니 그것은 왕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까사까」이궁 (별궁이라는 뜻)이었다.
『아!』
영친왕은 문득 40년 전의 일을 회상하였다. 그것은 이등박문에게 끌려서 외종사촌 엄주명 씨와 함께 처음으로 일본에 왔을 때 잠시 「아까사까」 이궁에서 묵었던 일이 생각난 때문이었다. 혼란한 영친왕의 머릿속에는
『조선독립만세!』
라는 민중의 부르짖음과 함께 『이왕 전하!』하고 자기를 환호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순간에는 또 『아니야, 아니야. 내가 무엇을 하였다고?』라는 생각과 함께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그러면 누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역사다』 역사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영친왕은 혼자서 이같이 중얼거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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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윌 31일자 (지방은 8월 1일자) 74회 기사와 표제 중 『윤홍섭씨는 윤 대비 마마의 친정 조카로…』는 『친정 동생으로』의 잘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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