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장편소설 쓴 아나운서 이계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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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마이크를 잡은 지 30년째를 맞고 있는 아나운서 이계진(李季振.56)씨가 장편소설을 펴낸다. 그동안 여덟권의 수필집을 통해 평소 경험하고 느꼈던 일들을 진솔하게 풀어내기도 했지만 소설을 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1966년 고려대 국문과에 입학해 문학도를 꿈꿨던 그의 꿈이 이뤄졌다고나 할까. 그는 방송국에 들어오기 전인 70년대 초 1년간 강원도 원주의 한 고교에서 국어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가 이달 말 내놓는 '솔베이지의 노래'(생각의 나무 발행)는 사랑 이야기다. 아련한 동화같은 풋풋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40대 후반의 남자 아나운서와 20대 여대생 사이에서 진행되는 낭만적인 사랑을 그려냈다. 하지만 사랑을 다루면서도 2백23쪽에 달하는 내용 가운데 섹스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한 군데도 없다.

"70년대 초반 영화로도 크게 히트했던 미국 소설 '러브 스토리'를 읽고 크게 놀랐습니다. 포르노가 범람하는 미국 사회에서도 '이토록 순수한 사랑 이야기가 통하는구나'라고 생각했죠.

사람들 마음 속에는 순수함을 갈망하는 원형적 속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그런 소설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엽기적 성매매가 난무하는 요즘 세상에 샘물 한 바가지를 부어 보자는 심정으로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소설의 주제는 30년 전에 정했지만, 소설의 구체적 얼개를 잡고 글을 완성하는 데는 지난 1년을 꼬박 투자했다. 서울 근교의 한적한 곳에 있는 그의 집은 소설을 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불교신자인 그에겐 '향적(香積)'이란 법명이 있다. 법명은 법정(法頂)스님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李씨는 자신의 소설에서 다루는 사랑을 본질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3월에는 송광사 불일암에서 수행하던 법정 스님을 찾아 이런 질문을 던졌다.

"스님께선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말씀만 글로 써주십시오."

법정 스님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붓을 꺼내 이런 글귀를 써주었다고 한다. '사랑은 따뜻한 눈길, 그리고 끝없는 관심-'.

李씨는 스님이 써 준 글귀를 되뇌며 소설의 퇴고(堆敲)작업을 했다. 주변에선 "성애(性愛) 묘사도 없는 소설이 요즘 시대에 먹히겠냐"며 무모한 도전이라고도 했지만, 그는 용기를 냈다. 소설쓰기는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고, 소설을 통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 갖고 있는 순수함을 점차 잃어버리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소설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도 바로 이것이죠."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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