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하필이면 간토 학살 맞물려 혐한 시위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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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서승욱
도쿄 특파원

한동안 잠잠하던 일본 우익들의 도쿄 코리아타운 시위가 재개될 모양이다. 시위의 중심세력인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재특회)’ 홈페이지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9월 8일 오쿠보 시위를 재개합니다”란 안내문이 최근 게재됐다.

 지난해 8월 이후 도쿄 신주쿠의 오쿠보 일대에서 매달 한두 차례씩 열렸던 우익들의 혐한(嫌韓)시위는 7월 이후 잠시 소강상태였다.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 “매춘부들이여,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인종차별적 구호에 일본 내에서도 역풍이 거셌다. 무엇보다 ‘이런 시위를 방치하는 국가에서 어떻게 올림픽이 열릴 수 있느냐”는 자숙의 목소리도 나왔다. 2020년 여름올림픽 유치를 국가 재생 프로젝트의 하나로 여기는 일반 국민도 시위에 반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시위를 다시 열겠다는 것이다.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를 독도로 가르치는 학교에 일본 정부가 왜 보조금을 주느냐”며 이번 시위에선 도쿄한국학교를 타깃으로 삼으려는 모양이다. 올림픽 유치 여부가 결판 나는 7일 아르헨티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 바로 다음날 시위를 재개한다는 속보이는 발상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인종차별적’이란 비판은 무서운지 주최 측은 “일본인에 대한 차별철폐를 주장하는 데모인 만큼 ‘(한국인) 죽어라’ ‘(한국인) 죽여라’는 구호는 기본적으로 필요 없다” 는 내용을 형식적이나마 공고문에 포함시켰다. 어쨌든 두 달여간의 짧은 평화를 잃게 된 오쿠보 한인들의 낙담과 충격을 생각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1일은 1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간토 대지진이 90주년을 맞은 날이다. 당시 일본 관헌들이 한 일은 성난 민심의 타깃을 조선인에게 돌리는 선동이었다. 이들은 “조선인이 방화와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얼토당토않은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그 결과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일본인들에게 학살당했다.

 오늘날 입에 담을 수 없는 혐한 구호를 외치며 오쿠보 거리를 활보하는 우익들의 모습도 9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잃어버린 20년’의 불황 속에서 의지할 곳을 잃은 젊은이들은 “재일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한류에 의해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약탈당하고 있다”는 선동에 이끌려 재특회의 활동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을 잊어선 안 된다”고 참회하는 일본 내 양심세력의 목소리가 90년 전 악질적 선동을 계승하려는 우익들의 억지 주장에 묻혀 힘을 잃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서승욱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