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에게 보낸 '절제된 경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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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해 광복절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경축사에서 일본 정치인들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용기 있는 리더십을 보여줄 것을 촉구했다. 북한을 향해서는 올 추석을 전후로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고 DMZ에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사진 청와대]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15일 정부 주최로 열린 ‘전국추몰자추도식’ 식사에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가해와 반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가해와 반성’은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이후 역대 총리들이 이 행사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해온 표현이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하지 않고 “역사에 겸허하게 마주하고 배워야 할 교훈은 깊이 가슴에 새기겠다”고만 했다.

 의도적으로 과거사를 망각하려는 듯한 일본을 향해 박근혜 대통령이 이날 단호한 메시지를 보냈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 맞는 광복절 경축사에서 “과거를 직시하려는 용기와 상대방의 아픔을 배려하는 자세가 없으면 미래로 가는 신뢰를 쌓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특히 일본 정치와 국민을 분리해 접근하며 이같이 지적했다. 그는 “대다수 일본 국민은 양국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만들어가기를 염원하고 있으나 정치가 국민의 마음을 따르지 못하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새로운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양국 국민의 바람처럼 일본의 정치인들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용기 있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독도 문제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다짐했다. 박 대통령은 “영혼에 상처를 주고 신체의 일부를 떼어가려고 한다면 어떤 나라, 어떤 국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 말의 학자 이암(1297∼1364)의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는 말을 인용하면서다. 정부 관계자는 “몸은 곧 독도를 얘기하는 것으로 일본의 독도 인식과 역사 왜곡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과거 역사에서 비롯된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계신 분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책임 있고 성의 있는 조치를 기대한다”고도 말해 사실상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과와 보상도 요구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감정적·자극적 표현 대신 완곡하고 절제된 언어로 일본의 올바른 선택을 압박했다. 일본은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함께 열어갈 중요한 이웃”이라고 전제하며 자신의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에 동참해줄 것을 주문했다.

 박 대통령은 “동북아 지역은 경제적인 상호 의존은 증대되고 있지만 역사와 영토를 둘러싼 갈등은 오히려 커지는 역설적 상황”이라며 “동북아 국가들이 ‘다자간 대화’의 틀을 만들어 가능한 분야부터 신뢰를 쌓아가고 안보 등 다른 분야로 협력의 범위를 넓혀가자”고 제안했다.

 전날 개성공단 정상화에 대한 합의로 북한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동승시킬 전기를 마련한 박 대통령으로선 이젠 일본을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해법을 모색해나가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박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비판 일색이 아니라 일본 정치와 국민을 분리해 접근한 것은 한·일 정상회담 등 관계 개선의 여지를 감안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북한에 대해선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박 대통령은 “개성공단 합의를 계기로 과거 남북관계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상생의 새로운 남북관계가 시작되기를 바란다”며 “이번 추석을 전후로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상봉할 수 있도록 북한에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분단과 대결의 유산인 비무장지대(DMZ)에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하기를 북한에 제안한다”고도 했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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