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 선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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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김활란 여사의 호는 우월이다. 그러나 정작 「우월」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헬렌」이 더 유명하다.
『하늘에도 밝은 달이 있는데 이 땅에 또 하나 달이 있으니 그이가 김활란이요. 또 하나의 달이라… 우월, 우월.』
그의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에 나오는 우월의 내력이다. 1922년 그의 형부가 지어준 것이었다. '우월'이 아니라도 그의 얼굴은 언제나 밝고 티가 없었다. 그러나 개화기의 여명과 함께 교육계에 뛰어든 그것이야말로 우월과 같은 것이었다. 김 여사는 '신여성'의 상징으로 평생을 살아 왔다.
1928년 김여사는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국제선교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선편으로 가는 길에 「사이공」항에 기항했다. 이때 갑판에서 하역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댕기머리를 땋아서 뒤에 늘어뜨리고 일을 하는데 여간 거추장스러워 보이질 않았다. 배가 다음 기항지인 「마르세유」에 닿았을 때, 그는 내리는 길로 이발소를 찾아 자기의 「트레머리」를 싹둑 잘라 버렸다. 아직도 그 머리 그대로이다.
시인 M여사는 우월을 『동양의 백합』이라고 불렀다. 우월은 외교사절로 사해를 누비면서도 줄곧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그는 젊을 때에도, 지금도 잠자리에서 별로 꿈을 꾸지 않았다고 M여사는 말한다. 평생을 그저 만족하며 살았기 때문일까.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가 그의 신념이며 생활철학이었던 것 같다. 자서전의 영문판 제목이 『족한 은혜』라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독신 생활」의 변도 그렇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고의로 결혼을 안 한다거나 독신을 하겠다는 생각이 따로 없었다. 그대로 살아와 보니…』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는 얘기다.
김여사는 이대 출신의 여성과 결혼한 남성을 허물없이 '사위'라고 불렀다. 이화 80여년사를 상기하면 그만큼 사회적인 영향력이 넓고 깊은 분은 또 없을 것 같다. 『남자 학교에도 마땅히 「홈·이커노믹스」(가정학)가 있음직하다』는 재담은 미소를 자아낸다.
우월은 한국 여성의 「개화」에 헌신한 『신여성의 어머니』란 점에서 「에피소드」가 많다. 그의 사회적인 풍모는 너무도 알려져 있어 오히려 이런 작은 「에피소드」들을 되새기게 된다.
우월의 별세는 한 시대의 종지부를 뜻하는 것도 된다. 이제부터는 제2의 신여성 시대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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