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구리의 시나리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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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결승 2국>
○·구리 9단(1패) ●·이세돌 9단(1승)

제9보(120~134)=상변에서 흑의 이세돌 9단이 최대한 버틴 것은 형세가 불리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버티는 바람에 뒷맛이 매우 나빠졌습니다. 구리 9단은 그 뒷맛을 이용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합니다.

 그 첫 수는 바로 122인데요, 이 수는 꼬리만 사는 수를 포기하고 전체를 살리겠다는 수입니다. 꼬리가 사는 것은 백의 권리이자 자랑이었지요. 한데 그걸 포기하고 전면전으로 맞붙은 것은 흑이 상변에서 조금의 양보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꼬리만 살아도 유리하긴 하지만 긴 승부가 되니까 차라리 끝장을 보기로 한 겁니다.

 125가 중요합니다. 최악의 수는 ‘참고도’ 흑1로 모는 수인데요, 백4가 좋은 수여서 대마 사활이 패가 됩니다. 꽃놀이 패지요(흑▲ 한 점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변에서 선수 한 집을 확보한 뒤 126에 웅크리면 흑은 127로 파호해야 합니다. 그때 128로 뚫고 나간다는 것이 구리의 시니리오입니다. 흑은 물론 129로 절단합니다. 백도 132, 134로 절단합니다.

 이제 변화의 전모가 드러났습니다. 흑이 A로 뛰어 상변과 연결할 수 있다면 백대마는 사망입니다. 바둑도 역전입니다. 하지만 구리 9단은 상변의 뒷맛이 너무 나빠 이 두 점은 살아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형세’라는 존재는 참 미묘하지 않습니까. 고수들의 대마도 가끔 죽는데 그건 순전히 ‘형세’ 때문입니다. 이 판도 형세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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