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까짓 리코더? 악기의 왕 리코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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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더리스트 권민석씨는 고음악을 고악기로 연주해야 하는 까닭을 커피에 비유했다. “개량악기 연주가 스타벅스 커피라면 고악기 연주는 바리스타가 원산지 커피 열매를 갓 볶아 갈아낸 커피죠.”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리코더(Recorder)는 낯익지만 리코더리스트(Recorderist)는 낯설다.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캐스터네츠나 트라이앵글을 치며 박자를 배우다가 멜로디로 넘어가며 손에 잡는 리코더는 시작하기 쉬워서 얕잡아보게 된다. 문방구에서 파는 음악교구이자 준비물일 뿐이라 더 만만하다.

 그까짓 리코더를 전공해 전문 연주자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리코더야말로 악기 중의 악기다.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악기 중 하나일 만큼 역사가 길고 연주 내력이 깊다. 고(古)음악의 원조라 할까.

 리코더리스트 권민석(28)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리코더와 사랑에 빠졌다. 교내 경연대회에서 반 친구와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를 2중주로 연주했는데 가슴을 울리던 화음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몇 년 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가 사준 네덜란드 고음악 연구자 프란스 브뤼헨(79)의 리코더 연주 음반은 그 사랑에 기름을 부었다. 서울대 작곡과 2년을 마친 권씨는 브뤼헨이 교수로 있는 헤이그 왕립음악원 고음악학과로 유학을 떠난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탄생이다.

 “리코더가 제 대접을 못 받는 한국에서 리코더리스트로 활동하면서 피해의식이 있었죠. 유럽에 가니 독립 학과로 리코더과가 있을 만큼 악기로서의 평가도 높고 연주자 층도 두꺼울 뿐만 아니라 연주회도 많은 거예요. 어깨를 쫙 폈죠.”

 25일 오후 8시 서울 새문안로 금호아트홀에서 열리는 독주회 ‘바로크와 즉흥연주를 잇는 다리: 혁신’을 위해 잠시 귀국한 권씨는 “원초적이며 단순하고 직접적인 느낌으로 매력 넘치는 리코더에게 매일 배우며 산다”고 했다.

 그가 털어놓는 리코더 예찬론의 핵심은 가장 ‘인간다운 악기’다. 사람이 입에 물고 자신의 숨을 불어넣으며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고 떼 음악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호흡이 곧 연주이므로 작고 소박한 그 피리를 통해 울려 나오는 소리는 사람 목소리를 닮았다. 그만큼 감정 기복이 잘 드러나고 표현의 감도가 섬세하다.

 “모든 악기 연주자는 장인이죠. 악보를 잘 읽어 작곡가의 뜻을 정확히 이해한 뒤 그대로 연주해 청중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악보를 연구하는 이상으로 악기에서 많이 배우죠. 아티스트가 아니라 좋은 악기 기술자가 되고 싶어요.”

 이번 연주회에서 그는 핑거의 ‘그라운드-디비전 그라운드’, 오테테르의 ‘플루트와 콘티뉴오를 위한 모음곡 제1번’, 캅스베르거의 ‘서주와 파사칼리아’ 등을 바로크 기타리스트 크리스티안 쿠티에레즈와 들려준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2번은 자신이 편곡한 리코더 버전을 선보인다. 바로크 시대 음악의 종결자로 꼽히는 바흐에 도달하기까지 음악이 어떤 길을 걸어왔나 더듬는다. 리코더와 전자 이펙터가 만나는 즉흥연주도 끼워넣었다.

 “고음악 연주는 신선함이 핵심이죠. 그 곡을 만든 작곡가에게 가장 가까이 가서 싱싱하게 재창조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박물관에 들어간 그 시대 악기를 최대한 가깝게 복제해 연주하는 것이 좋죠. 청중도 인내심을 가지고 생각하면서 집중해 들어주시면 좋고요.”

 권씨는 석사학위를 받고 학교 동료들과 고음악 앙상블 ‘콩코르디 무지치’를 만들어 활동하며 리코더의 무궁한 음악탐험을 계속한다. 암스테르담 음악원 지휘학과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하면서 순간을 위한 즉흥연주의 세계를 헤엄칠 예정이다. 마이너 중의 마이너 악기를 무대의 왕으로 귀환시키는 ‘리코더의 꿈’을 그는 한 호흡 한 호흡 밀고 간다.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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