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계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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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오늘부터 9월.
나직이 가을의 소리가 들린다.
황금빛으로 늘어진 벼이삭 사이에서, 탐스럽게 갈라지는 밤송이에서, 또는 귀뚜라미의 소리를날라다주는 숲사이에서. 사뿐히 가을의 표정이 자연위를 뒤덮는다.
아침 이을을 머금은 풀잎위에, 놀을 받아붉게타오르는 사과위에.
이제는 오곡백과의 계절, 가을은 군침이 나도록 사람들의 혀끝을 간지럽혀 놓는다.
신도주에 올벼 송편, 토란국의시식에다 밤·대추·머루·다래등의 산과실, 양애나뭍, 박나물…비록 고기는 풍성하지 못하지만 새곡식에 새 과실로 입맛이 돋우어지는 설. 이런 때면 『새로 빚은 술과 새닭을 잡아 이웃이 모두 취하도록 마시고 배불리 먹으며 즐기는』 ( 『동국세시기』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은 심술장이 이기도 하다.
그처럼 위대했던 여름의 숨결을 막아낸 가을은 다시없이 즐거운 향연에 사람들을 초대해 놓고는 고독을 안겨 주고 돌려보내는 것 같다.
여름의 태양아래 그처럼 화려했던 장미도 우수의 그늘을 지니고, 바다는 황량한 빛을 띠게되는 것이다.
그리고 향연에 한몫 낀 사람이나 끼지못한 사람이나 다같이 외로운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것이다.
…이제 고독한 사람은 앞으로도 오래도톡 고독을 되씹으며, 자지않고 읽으며, 기나 긴편지를 쓸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 오솔길을 불안하게 소요할 것입니다.
나무들 잎이 달아 떨어질 때.
이렇게 노래한「릴케」처럼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들, 떠나가 버리며 있는 모든것을 서글퍼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가을이 베풀어주는 향연을 마음껏 즐기기만 하면 된다.
달의 창백한 표정을 애태워할필요도없다.
그저가을달을하늘높이매달아놓고 『앵당앵당벌이난다. 유자·탱자 담이나 넘자』면서가을을 즐길수만 있으면 된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않을것 처럼.
가을의 소슬바람보다 더 세차게 역사의 광포한 바람이 불고있을때에는 그러는게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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