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왜 DJ가 밝혀야 하는가

중앙일보

입력

누구라면 알 만한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최근 중앙일보 기자와 만나 청와대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대북송금에 관한 국민적 의혹 중 대북 뒷거래설, 정확한 지원 규모, 현대그룹과의 유착설을 대통령이 대국민 성명을 통해 직접 밝히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박지원 실장과 임동원 특보가 완강히 말려 대통령이 결심을 못한다고 했다.

"나는 책임 없다"식의 얕은 수가 엿보이긴 하지만 대북송금 의혹의 실체와 해법이 이 말 속에 담겨 있음은 사실이다.

*** DJ도 살고 햇볕도 사는 길

4천억원 의혹이 제기된 지난해 10월 나는 DJ가 직접 나서 의혹을 밝혀야 함을 본란에서 촉구한 바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이유에서다. 다만 그때 밝혔으면 홀가분하게 청와대를 떠날 수 있었을텐데 지금껏 미뤄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게 유감일 뿐이다.

DJ가 국민 앞에 해명해야 할 이유는 첫째, 대북 화해.협력정책의 지속성을 위해서다. 송금 의혹이 언론이든 특검이든 제3자에 의해 밝혀질 경우 DJ의 햇볕정책도 DJ와 함께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과 북의 화해 협력은 적어도 북핵 사태 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기여한 바 컸다. DJ정부 들어 북한 왕래 연인원이 수만명에 달해 북의 실정을 우리 스스로 가서 보고 배웠다.

각종 문화.예술.스포츠 행사가 남북 간에 이뤄진 것도 남북 이질화를 극복하는 중요 요소다. 5천8백여 이산가족 상봉에서 면회소 설치 접근, 금강산 육로관광도 분단의 아픔을 해소하는 진일보된 성과다.

물론 대북 지원의 투명성과 상호주의 원칙 적용의 실패, 1회성 이벤트 아닌 평화정착을 담보하는 제도적 상호협력의 미숙 등은 DJ 햇볕정책의 결격사유였다. 향후 이를 교훈삼아 극복하는 노력을 보이는게 과제다.

그런데 대북송금 의혹 이후 이런 모든 성과와 노력이 물거품이 됐고, 화해.협력정책 자체가 금기시되는 형세로 바뀌고 있다. 과연 이래도 되는가. 북한에 가본 사람이라면 안다. 입북자에겐 어떤 형태로든 지원을 요청하는 게 북의 관행이다.

아사자가 속출한다는 북의 사정을 알면서 모른 채 넘어갈 수도 없다. 그래서 좋은 의미에선 성금, 나쁜 의미에선 뒷거래가 있어온 게 현실이었다.

현실이 그렇다고 정부가,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돈주고 살 수 있느냐는 비난 대상에서 면책이 될 수는 없다. 국가 정책도 사업 베이스다. 사업 성공을 위해 나름대로 거래가 필요하다.

그 거래의 전말을 적어도 여야 대표와 미국 측에 넌지시 알려주는 최소한의 투명성 절차를 밟았다면 국민의 분노와 실망이 이처럼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을 국민 앞에 사과하고 늦게나마 그 전말을 소상히 밝히는 게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책무다.

둘째, 국민적 의혹 속에 사법심판 대상이 되는 대통령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솔직한 대국민 고백을 듣고 싶어 한다. 이미 우리는 역대 대통령을 비명횡사케 하거나 교도소에 보낸 전력을 갖고 있다.

그 모두가 자업자득의 결과라 해도 온전한 퇴임 대통령을 두고 싶은 게 국민적 소망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의혹을 소상히 밝히고 밑의 사람이 월권 행위를 한 게 있는지, 대통령도 모를 또 다른 의혹이 있는지 등을 검찰 조사로 밝혀내는 게 순서다.

셋째, 역사적 교훈을 남겨야 한다. 지금까지 의혹을 종합하면 대북 사업이 정부 사업인지, 현대 사업인지 헷갈릴 뿐이다. 정부 차원의 정상회담을 주선하면서 현대 돈으로 어물쩍 넘어가고 뭔가 대가를 기업에 줬다면 이는 명백한 정경유착이다.

그동안 DJ정부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다면 이 또한 국민 앞에 책임질 일이고 차기 위정자도 다시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쐐기를 박아야 한다.

*** 국민들이 원하는 건 솔직한 고백

또 대통령이 통치행위라는 군주적 용어를 함부로 쓸 수 없도록 선례를 남겨야 한다. 이미 IMF체제에 대한 정책 책임을 강경식. 김인호 양씨에게 물어 구속했던 게 김대중 정부다.

이번엔 정책 잘못이 아니라 정경유착이라는, DJ 자신이 가장 혐오했던 범죄 의혹을 사고 있다. 이 의혹을 풀지 않고선 대북정책, 대통령 안위, 대외경제 신인도 모두가 무너질 위기상황이다.

DJ 퇴임이 열흘도 남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내일이라도 대통령이 국민 앞에 진실을 털어놓아야 한다. 국정조사나 특검은 그 다음 국민적 합의로 결정할 일이다.
권영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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