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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노동계, 대화로 풀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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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럽의 선진국들도 경제전선에 비상이 걸렸다. 최고의 기술과 경영전술로도 저성장을 면치 못하고, 특히 독일의 경우 실업률이 8%, 실직자가 520만 명 정도로 치솟았다. 경제인들은 두 가지 해법을 내놓았다. 법인세 인하와 노동유연성 강화. 독일 기업이 부담하는 비용은 법인세 45%, 사회보장세 20%로 수익의 약 65%에 달한다. 여기에 전체 노동자의 85%가 단단한 안전장치로 보호된다. 기업인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올 만한데, 세계 최강의 노조가 버티고 있어 신규채용과 해고의 문턱을 낮추는 조치는 엄두를 못 낸다.

한국의 기업은 법인세 25%, 사회보험 약 10% 해서 총 35% 정도의 세금을 물고 있으니 아직은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노동유연성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한국의 노동유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중간 정도로 평균수치가 독일과 유사한데, 정규직의 매우 단단한 경직성과 비정규직의 극단적 유연성이 상쇄된 수치라는 점이 문제다. 정규직은 각종 노동법과 노조에 의해 보호받는 반면, 비정규직은 외풍이 심한 허허벌판에 내몰린 상황이다. 그런 비정규직이 IMF 외환위기 이후 급증해서 27.3%(2001년)에서 37%(2004년, 540만 명)로 늘었다. 비정규직이 임금과 지위 차별의 대표적 통로라면, 비정규직 증가는 한국을 양극화 사회로 몰고 가는 주범인 셈이다.

정부는 이를 풀기 위해 비정규직 법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민주노총과 민노당은 절대불가 방침을 정하고, 급기야는 경고파업에 돌입했다. 쟁점은 두 가지다. 첫째, 기존과는 달리 정부입법안은 기간제 근로의 총사용기간을 3년으로 못 박아 기정사실화했다는 것. 노동계는 이 조항이 오히려 3년 계약의 비정규직을 양산할 것으로 우려하는 반면, 정부는 계약 만료시 정당한 사유 없는 해고와 근로조건 차별 금지 규정을 명시했기에 비정규직이 줄어들 것으로 확신한다. 둘째, 파견근로자 문제는 더욱 첨예하다. 정부법안은 파견근로자의 업종과 범위를 확대하고(금지업종만을 명시하는 방식), 불법파견에 철퇴를 가해 합법파견 내지 정규직화를 촉진시킨다는 취지다. 하도급 관행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현실에서 파견근로자가 그나마 한시적 근로자보다 근로조건, 임금, 사회보험 적용률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이다. '합법파견화'는 기업의 노동유연성과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정부의 묘책이다. 노조는 또 해석이 다르다. 숙련노동도 대체 위험이 급증하는 마당에 합법파견이 장려되면 파견근로자로 넘쳐난다는 것이다. '3년짜리 계약직 또는 파견근로 노동시장을 전국적으로 형성시키는'이 법안을 결코 좌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동일한 문구를 두고 해석이 이렇게 엇갈리는 이유는 결국 '신뢰 결핍'에 있다. 정부는 각종 처벌조항을 강화해 문제가 없다고 확신한다. 처우차별에 1억원 이하의 과태료, 불법파견에는 3년 이하의 징역형과 벌금을 적용하고, 3년 파견 이후 직접 고용 의무를 부과하는 등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편법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처벌과 규제만으로는 '악용 가능성'을 차단할 수 없다는 게 민주노총의 주장이다. '선의로 해석하라'는 정부의 호소에 대해 민주노총은 '믿을 수 없다'고 응수한다. 민노당은 한 발짝 더 나간다. 파견근로 제도를 아예 폐지해서 정규직화하고, 노조가 노동인력의 공급권한을 행사해서 인원선발 및 계약을 담당하겠다는 것이다.

유럽 선진국들도 노동유연성을 높여 세계경쟁에 나서는 마당에 기업의 지급능력과 노동현실을 고려한 정부안이 현명한 대안일 수 있겠으나, 하청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와 고용주의 편법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는 분명 난제다. 민노당의 비현실적 대안은 일단 제쳐두고라도, 날을 곤두세운 민주노총을 설득하는 게 급선무다. 법안 가결을 감행하기 전에 노사정위에 복귀한 민주노총을 상대로 다시 토론하는 게 좋다. 파업 국면에 처한 노정관계는 현 정권과 노동계 간의 감정대립, 말하자면, '더 믿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노동계와 '양보할 때도 됐다'고 권고하는 정부의 충돌이다. 정부가 오랜만에 내놓은 의욕적 대안이 불신의 장벽에 막혔다면 서로 납득할 때까지 대화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단, 노조도 2만 달러 문턱을 넘어야할 우리의 경제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조금은 물러설 줄 아는 성숙미를 보여줄 때도 된 듯하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