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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고 쪼잔한 것, 이 어찌 행복이 아니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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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김성탄은 명말 청초(明末 淸初)의 문예비평가입니다. 어느 날 열흘 비에 발이 묶인 산사(山寺)에서 친구와 한담을 나눕니다. 심심파적, 인간은 언제 행복할까. 인생의 행복한 순간을 꼽아보기로 합니다. 33가지를 꼽았습니다. 아주 소소한 행복, 일견 쪼잔하기까지 한 행복들입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이웃의 구두쇠 영감이 죽었다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이 어찌 유쾌하지 않은가.’ ‘문서를 정리하다가 못 받게 된 오래된 차용증을 모조리 태웠네.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닌가.’ ‘여름날 오후, 새빨간 큰 소반에 새파란 수박을 올려놓고 잘 드는 칼로 자른다’ ‘누군가 날리던 연실이 끊어진다….’ 김성탄은 이를 ‘불역쾌재삼십삼칙(不亦快哉三十三則)’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조선조 많은 문인들이 이 불역쾌재의 운을 빌려 시를 짓고 글을 썼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불역쾌재 연작시 20편이 그중 유명합니다. 임어당(林語堂)이 영문판 『생활의 발견』에서 ‘서른세 가지 행복한 순간’으로 소개하면서 이 글은 서구에까지 잘 알려졌습니다. 임어당은 “인간의 정신과 관능이 빈틈없이 결부된 한때”라고 평했습니다. 학창 시절 짜증나는 여름날, 학우들과 ‘불역쾌재’ 운을 떼며 잠시 더위를 쫓던 기억이 새록합니다. 문득 그때를 돌아보며 나름 ‘7가지 쪼잔한 행복’을 꼽아봤습니다.

 하나. “점심 같이할 사람?” 휴일 오후 가볍게 얘기했는데, 하나 둘 모인 후배들이 열 명을 넘어선다. 머릿속 계산이 바쁘다. 비빔밥 한 그릇씩만 해도 10X8000원=8만원. 이크, 출혈이 크네. ‘손재수 있는 날이군’ 하며 자포자기할 때, 갑자기 나타난 A선배. “이 점심 내가 쏜다”고 호기롭게 외친다.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은가. 둘. 친구들과 모처럼 내기 골프, 야심차게 휘두른 공이 물에 풍덩. 이를 본 친구들, 미소를 지으며 친 샷이 줄줄이 OB를 낼 때. 이 또한 행복이 아닌가. 셋. 왜 내 주변엔 착한 사람들만 있는 걸까. 항상 의문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 왈 “까칠한 그 성격 받아주려면 착할 수밖에”. 이 어찌 행복이 아니랴. 넷. 구내 식당에서 300명 한정 특별식 햄버거가 나온 날. 부랴부랴 뛰어갔지만 이미 길게 늘어선 줄. 자포자기 심정으로 배식대까지 갔더니 마지막 햄버거가 바로 내 뒤에서 끊길 때. 이 또한 행복하지 않은가. 다섯. 계절이 바뀌어 지난해 양복을 꺼내 입는데, 주머니에서 나온 세종대왕님. 이 또한 행복이 아니랴. 여섯. 혹시나 해서 긁었더니 역시나 꽝, 1000원에 산 일주일치 희망 로또. 이 또한 행복이 아닌가. 일곱.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잠이 들었는데, 더위에 뒤척이다 깸.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어라. 한 시간 더 잘 수 있네. 이 또한 행복이 아닌가.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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