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고아 키워 준 국가에 보답하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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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진호

정전 60년. 전쟁 고아였던 보훈청록회 김진호(62) 회장은 매년 이맘때만 되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된다고 한다. 전생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자신을 키워 준 이웃의 손길, 국가의 손길에 보답해야겠다는 의지다.

 김 회장은 6·25전쟁에 참가한 부친이 양구 전투에서 사망한 뒤인 1951년 태어났다. 노량진 시장 노점에서 잡화를 팔아 김씨를 키우던 어머니마저 4년 뒤 사망했다. 김씨는 큰아버지 손에 맡겨졌다. 하지만 65년 큰아버지의 퇴직과 함께 가세가 기울자 몸을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때 김 회장을 맞아준 곳이 보훈원(당시 종합원호원)이었다.

 보훈원은 국가유공자와 유가족들을 국가가 돌봐야한다는 방침에 따라 63년 개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관심이 각별했어요. 당시 밀수품으로 적발돼 정부 창고에 있던 물건들을 전부 보훈원에서 사용했으니 생활 환경은 최고였죠.” 끼니도 다 챙기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일제 ‘야마하’ 전자오르간까지 갖춘 보훈원 밴드는 수원시 각종 행사를 빛내는 존재였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보훈원 안에 있는 양어장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낚싯대를 드리우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다른 사람들의 접근은 철저히 통제됐지만 원생들은 예외였다”고 회상했다.

 원생들은 출신 지역도, 자라온 환경도 달랐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를 입었다는 공통점만으로 서로에게 큰 힘이 됐다고 한다. 김 회장은 “그땐 정말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생긴 기분이었다”고 했다. 서로 의지하며 지내다보니 보훈원에서 함께 지내다 결혼한 부부가 9쌍이나 된다고 한다.

 원생들은 보훈원에 설치된 직업보도소에서 배운 기술과 지식으로 한국전력 등 공기업과 전국 각지 은행에 취업했다. 김 회장도 대한석유공사에 71년 취직해 81년까지 다녔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미성년 자녀들의 보금자리였던 국립보훈원은 2006년 고아원 활동을 마감했다. 대신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이 국가보훈처의 위탁을 받아 중증질환을 앓고있는 국가유공자, 유가족을 대상으로 요양 사업을 하고 있다. 양로전문요양센터와 보훈의원 등 양로 시설을 확충했다.

 보훈원을 거쳐간 전쟁고아는 923명. 김 회장은 지난 91년 보훈원에서 새 삶을 찾은 원생들과 함께 보훈청록회를 만들었다. 국가유공자 손·자녀를 위한 장학 사업 등이 주 활동이다. 김 회장은 “국가로부터 받은 만큼 후대에 도움이 되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정종문,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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