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 세상을 말하다] 金榜 [금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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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매 병이 서로 따르니(老與病相隨)/ 일평생 포의의 신세(窮年一布衣)/ 현화(玄花·병든 눈동자)는 아스름하고(玄花多掩映)/ 눈동자[紫石] 광채 적구나(紫石少光輝)/ 등불 앞에 글자 보기 겁이 앞서고(怯照燈前字)/ 눈 온 뒤에 햇빛이 부끄러워라(羞承雪後暉)/ 조금 있다 금방(金榜)이나 보고 난 뒤에(待看金?罷)/ 눈감고 들어앉아서 세상 일을 잊으리(閉目坐忘機)”.

고려 중기의 글 재주꾼 오세재(吳世才·1133~?)의 시 ‘병든 눈[病目]’이다. 번역은 양주동 선생의 『동문선(東文選)』(1968)본이다. 과거 합격자 명단인 ‘금방’에 이름 석 자 올리려는 만년 고시생 포의(布衣)의 푸념이 애처롭다.

번쩍이는 황금 종이에 합격자 이름 가득한 청(淸)의 ‘금방’은 200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가 신청됐다. 이름만 열거된 ‘금방’의 가치를 모르는 서양 심사위원 사이에 부정적 기류가 흘렀다. 회의는 공교롭게 중국에서 열렸다. 난처해진 심사위원회 의장은 유일한 동아시아 출신 위원인 서경호 서울대 교수에게 발언을 부탁했다. 서 위원은 네 가지 요지로 발언했다.

첫째, 중국은 15세기 이전까지 전 세계 문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인구와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하나의 국가로 간주해 유럽의 한 국가와 비교하는 것은 불가하다.

둘째, 중국은 6세기부터 세계 최초로 시험이란 제도로 관료를 선발한 국가다. ‘금방’은 그 전통의 실체를 보여주는 기록유산이다.

셋째, ‘금방’이 자금성(紫禁城)에 내걸리면 전 중국 수억의 사람 사이에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슬픔이 교차했다.

넷째, ‘금방’은 당시 서부 유럽의 몇 배에 달하는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게 될 차세대 정치 지도자의 탄생을 알리는 칙서(勅書)였다.

서 교수의 발언이 분위기를 180도 바꿨다. 표결조차 취소됐다. ‘금방’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한·중 공조의 멋진 사례다.

지난주 중국 청년 200명이 한국 정부 초청으로 인문 여행을 다녀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윤진영 선임연구원이 이들에게 ‘금방’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얽힌 일화를 들려줬다. 이번 주말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만난다. 새롭고 화목한 이웃 사이인 ‘신형목린관계(新型睦隣關係)’의 시작이 될 중요한 회담이다.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遠親不如近隣)’고 했다. 정상회담의 성공을 기대한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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