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찾는 고도「후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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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8년 이맘때 월맹 정규군을 포함한 「베트콩」세력은 연합군에 대해 「베트남」전쟁 최대의 공세를 퍼붓고 사력을 다해 옛 황도 「후예」를 공략했다. 동족상잔의 피로 붉게 물든 유서깊은 향강은 그후 1년만에 전흔의 상처가 아물고 그 알수없는 「베트남」의 정적속에 다시 잠겨들었다. 다음은 「후예」전투 1주년을 맞아 그곳을 둘러본 『다시찾은 「후예」의모습』이다.
「그놈들을 패주시켰읍니다.』
옛황도 「후예」가 자리잡은 「투아티엔」성의 「레·반·탄」성장은 조용히 입을열었다.

<25일간의 시가전>
북쪽이 고향인 「가틀릭」신자의 「탄」대령(37)은 월맹군과 「베드콩」이 작년 복정공세 때가장 치열한 공격을 편이래 1년이 지나간 오늘의 「후예」를 말하는것이었다. 적은 「베트남」의 이고도에서25일간의 치열한 전투를치른 다음에야 그림자처럼농촌으로 사라졌었다.

<적손시 2천6백>
월남전최대의 시술전이 벌어졌던 「후예」전투에서 미·월군전사자는 3백57명에달했고 적손실은 2천6백42명이나 되었다. 이난리통에 「후예」인구14만명중 3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후1년-전쟁때 파괴된 집에는 다시 사람들이 들어섰고 따가운 햇빛에 양철집들은 날카롭게 반사했다. 하지만 그 유서깊은 향강양안의아름다운 「빌라」들은 아직도 옆구리가 뚫린 상처를 드러낸채 늘어겨있고 병원을포함한 성청의 곳곳에는 타다남은 대들보들이 하늘을 이고있었다.

<정병·장교를 탕진>
「탄」대령은 구정공세를 다음과같이 분석하고 결론지었다. 적참패의 최대원인은 그들이 굉장하긴 하지만 단기적인 공세의 성공을 가져오려고 가장 열성적인 정병과 장교들을 탕진해버린데있다. 다시말해 이들은 충원시킬 수 없는 정병들이었단 말이다. 성장은 영어로 「후에」정세를 계속 설명한다. 『구정이 래병력상황은 우리쪽에 유리해졌읍니다. 67년엔 「베트콩」세력이 팽창하고 있었죠. 1백20명 규모의 중대들이 많았읍니다. 이제 그규모는 30명, 그것도 2개중대는 그때 막심한 피해를 입었읍니다.』

<분쇄된 지하조직>
「후에」시와 성곽을 탈환한 연합군은 그때 적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이들을 포위·섬멸하면서 서쪽 「정글」지대로 몰아내었다. 또동쪽의 「빈·록」섬을 급습하여 지방 자위대를 쳐부수고 지하조직을 파괴해서 주민 5만명을 정부관할속에 넣게 되었다.
「후에」, 「다낭」철로들도 개통되고 1번도로도 열려있다. 이국도는 67년에 1백회의 공격을 받았으나 작년엔 불과 열번으로 줄었다는 「탄」대령의 말이었다. 마을마다 경보장치를 달아 지형에 익숙하기못한 정부군을 돕고있다.

<전세는 날로호전>
자위대가 3만명, 매주 1개중대가 늘어날만큼 모병이 쉬워졌고 작년 한햇동안만해도 적은 각종작전에서 2만5천이란끔찍한 수의 전사자를 냈다는 설명이다.
하여간 「투아티엔」성내의 4백72개 마을중 정부쪽이 2백40개를 차지하고 「베트콩」이 30개, 중립이 70개마을이 될만큼 전세가 호전되었다는 설명이다. 나머지는 유령처럼 방기된채로 있다. 이 「유령마을」들은 「후에」∼「쾅트리」성을 잇는 『즐거움없는 거리』쪽에 흩어져있는데 이곳은 「프랑스」군이 「베트민」군을 물리쳐 혈투를 벌이던곳이다. 어떤것은 텅비어있고 어떤것은 파괴된채이며 주민들은 난리를피해 달아나고 말았다.

<가끔포탄날아와>
그혈위야 어떻든 하여간 「탄」대령의 낙관은 현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하지만 「베트콩」의 「로키트」공격은 아직도 가끔있다. 지난주 1백22밀리포로 처음 갈겼는데 요행히도 성장집은 빗나갔다. 그바람에 유리창만 다 깨어졌다.
『설마. 그먼 거리에서 날조준한건 아니겠죠. 운수분이지‥.』
그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의 골칫거리는 「탄」보다 운수가 덜좋은 사람들이 이런 「비트콩」공격에 그야말로 면역이 돼 버렸다는 사실에 있을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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