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 세입자 74%, 임대차 보호 못 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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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5년 전 서울 봉천동 상가를 임대해 음식점을 차린 석모씨. 장사가 제법 잘돼 올해 재계약할 생각인데 주인이 월세를 90만원(40%) 올려주든지, 가게를 비우라고 해 난감하다. 월세를 그만큼 올려주면 손해를 보게 되고, 가게를 비우면 권리금 5000만원과 인테리어 비용 1억원을 날리기 때문이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월세를 9% 이상 올리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석씨는 보호법에서 정한 기준보다 임대료가 비싸 보호법 적용을 받지 못한다. 석씨는 “상가임대차보호법 기준이 까다로워 상가 세입자를 보호하는 데 무력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2년 반 동안 서울 길동에서 의류점을 운영하고 있는 안모씨는 최근 쫓겨날 상황이 됐다. 다시 계약한 지 6개월 만에 주인이 상가를 팔아서다. 안씨의 임대료도 보호법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 보호법이 정한 5년의 영업 기간이 보장되지 않는다. 안씨는 “주인이 바뀌었다고 장사를 그만두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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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 세입자 4명 중 3명이 속을 끓이며 영업하고 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주인의 월세 대폭 인상 등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이 법이 11년 전 상가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제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상가정보제공업체인 에프알인베스트먼트는 서울시내 5200여 개 상가 점포를 조사한 결과 보호법 대상이 1368곳(26%)으로 집계됐다고 20일 밝혔다. 나머지는 임대료가 법에서 정한 기준 금액을 초과해 보호법 대상에서 제외된다. 보호법은 환산보증금(월세×100+보증금)이 일정한 금액 이하인 세입자만 보호한다. 지역별로 서울 3억원 이하, 수도권(과밀억제권역) 2억5000만원 이하, 지방 등은 1억5000만~1억8000만원 이하다.

 현재 서울의 평균 환산보증금이 법적 기준의 2배가 넘는 7억5000만원가량이다. 임대료가 비싼 대형 상권(강남·압구정·명동·신촌)을 제외하더라도 환산보증금이 5억원이 넘는다.

 에프알인베스트먼트 안민석 연구원은 “3억원 조건을 맞추려면 보증금 1억원에 월세가 200만원을 넘지 않아야 하는데 서울에서 이런 조건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보호법이 ‘허수아비’가 된 것은 상가 임대료가 환산보증금 상승보다 훨씬 많이 올라서다. 보호법 시행 이후 지금까지 서울 평균 임대료가 38% 상승하는 동안 환산보증금은 두 번의 조정을 거쳤는데도 13% 오르는 데 그쳤다.

 보호법의 우산을 쓰지 못하면 상가 세입자는 주인의 요구대로 월세를 올려줘야 하고 5년간 마음 편히 장사할 수도 없다. 상가가 경매에 넘어갈 경우 은행 등 선순위 채권자에 밀려 보증금을 떼일 위험도 크다.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 권강수 이사는 “가게를 안정시키는 데는 5년 정도 걸린다”며 “보호법 없이는 장사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문을 닫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전문가들은 보호법의 현실화가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상가 세입자를 보호하지는 못하더라도 보호 대상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법무법인 도담 김남주 변호사는 “환산보증금을 폐지하거나 절반 이상의 세입자가 보호받을 수 있게 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영업의 안정성을 위해 환산보증금에 상관없이 일정한 기간의 영업기간이 보장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의 경우 전세보증금에 상관없이 세입자는 2년간 전세를 살 권리가 있다. 상가뉴스레이다 선종필 대표는 “제도 보완에 앞서 상가 세입자는 전세권 등기를 통해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우선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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