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요구 맞춰 '모자바꿔쓰기' 하던 북한, 국장 타이틀 이례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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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달술, 이동복, 정세현.

2년4개월 만에 재개될 뻔한 남북 대화의 문이 ‘격(格)’ 논란으로 다시 닫혔다. 그동안 회담 의제나 회담장에서의 발언이 문제가 돼 회담이 결렬된 적은 있지만 회담 시작도 전에 수석대표의 ‘격’이 맞지 않다고 보이콧한 건 처음이다.

 북한이 이번에 회담 단장으로 강지영(노동당 부부장급)을 지명하면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국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온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당초 회담에 뜻이 없었던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도 북한은 회담에 나올 때 다른 직책을 달고 나오거나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직책을 달고 나온 경우가 많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 남북 정상회담(김일성 사망으로 무산) 실무접촉엔 김용순(2003년 사망) 대남담당 비서가 최고인민회의(우리의 국회) 통일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회담에 나왔다. 당시 이홍구 부총리 겸 통일부 장관의 카운터파트여서 정당을 연상시키는 당의 직책이 아닌 ‘다른 모자’를 쓴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 남북 장관급회담 때 북측 단장이 ‘내각 책임참사’라는 타이틀을 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세현(68)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은 노동당이 국가 기관(내각)을 통제하는 당 우위 체제여서 우리와는 직책이나 직위가 달라 격을 정확히 일치시키기 어렵다”며 “북한이 우리 정부 대표단과 격을 맞추기 위해 없는 직책을 만들거나 최대한 국가기관과 유사한 모자를 쓰는 형식이었다”고 말했다.

 남북대화사무국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이동복(76) 북한민주화포럼 대표는 “72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때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처음부터 자신들의 직책을 공개하고 협상에 임했다”며 “이후에는 서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차원에서 알아서 격을 맞춰 왔다”고 전했다. 남북이 장관이나 차관 등 회담의 성격에 맞는 사람을 내보냈고, 장·차관으로 인정하는 상호 간주(看奏)주의 원칙에 따라 상대방이 내세운 대표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게 묵인돼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례에 비쳐봐도 소속이나 ‘급(級)’을 맞추지 않은 강지영이란 ‘와일드 카드(wild card)를 낸 건 이례적이란 지적이다. 1970년대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 회담사무국(이전에는 중앙정보부가 회담을 관장했음)에서 회담 전략을 짜고 회담에 관여했던 김달술(84) 전 남북회담사무국 자문위원은 “북한이 당 외곽기구 담당자를 내보낸 건 6·15 공동행사 개최에 집중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7·4 남북공동성명 공동 행사,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문제보다 김정일 위원장의 치적으로 삼고 있는 6·15에 집중하려 했다는 얘기다.

 정부도 류길재 통일부 장관과 김양건 비서를 이미 동격으로 맞춰 놓은 상황이어서 이 같은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향후 남북 대화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지금이라도 북한이 ‘급’이 있는 사람을 내면 된다”고 말했다. 남북이 대표단 명단을 새로 짜서 다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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