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인권 보호하려다 도피 방조한 검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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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윤호진
사회부문 기자

지난 4월 30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에선 방송인 비앙카 모블리(24·여)가 여러 차례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법정에 설 예정이었다. 미국 국적의 비앙카는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거침없는 부산 사투리와 미모로 유명세를 탄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앉아 있어야 할 피고인석에 나타나지 않았다. 변호를 맡은 국선 변호인이 대신 “비앙카가 본국인 미국으로 출국했다”고 말했다. 그 뒤 재판부는 두 차례 재판 날짜를 늦춰 잡았지만 비앙카는 지난 4일 3차 공판기일에도 나오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검찰이 출국정지 기한을 연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사 기간 중에는 출국정지를 해 두었으나 혐의를 확정하고 불구속 상태로 기소를 하면서 기한 연장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앙카는 공항 출국장을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고 비난이 쏟아지자 검찰은 8일 해명 자료를 냈다. 검찰은 “피고인의 인권 보호를 위해 출국정지는 신중해야 하며, 불구속 기소할 때는 실형 선고 가능성을 고려해 출국정지를 신청한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실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낮은 불구속 상태의 피고인에 대해서는 출국정지를 하지 않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얘기였다. 요컨대 검찰이 출국정지를 연장하지 않은 것은 사무 착오나 실수가 아니라 그런 원칙에 충실한 결과였다는 논리인 셈이다.

 검찰의 이 같은 주장은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다. 범법 행위를 한 피고인이라도 과도하게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검찰은 비양카가 재판 전에 해외로 출국할 가능성이 높은 외국인이란 점을 간과해, 결과적으로 출국성 도피를 방조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범죄를 수사하고 기소하는 것만으로 검찰의 역할이 끝나는 게 아니라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함으로써 법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 역시 검찰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건 실형 가능성이 극히 낮은 범죄라도 예외일 수 없다. 혐의의 경중(輕重)에는 차이가 있지만 일각에선 이번 사건을 두고 14년 전 이태원 살인사건을 거론하기도 했다. 검찰은 당시 용의자 아더 패터슨(32)에 대한 출국정지를 취하지 않아 미국으로 도주할 수 있도록 빌미를 제공했었다.

 결국 재판부는 출국정지보다 더욱더 ‘인권’과 ‘자유’가 제한되는 구금영장을 발부했다. ‘피고인의 인권 보호’ 운운한 검찰의 해명이 무색해지는 부분이다. 뒤늦게 검찰은 미 사법당국에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이는 더더욱 코미디에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결국 도망친 피고인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상황을 검찰이 자초한 것이다.

윤호진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