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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 런던 도로서 군인 난자 … 영국도 '신세대 테러' 공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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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2일(현지시간) 런던 울위치 존윌슨 스트리트에서 일어난 테러 살인 직후 현장을 지나던 잉그리드 로요 케네트(오른쪽)가 범인 중 한 명과 대화를 나누며 추가 범행을 막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또 다른 범인(오른쪽)과 거리에 쓰러져 있는 희생자의 모습. 극단 이슬람 추종자로 알려진 범인들은 현역 군인인 희생자를 차로 들이받은 뒤 흉기로 난도질했다. 이들은 경찰의 총격을 받고 병원에 후송됐다. [트위터·영국ITV 캡처]

2005년 런던 지하철 테러(56명 사망) 이후 효과적 대테러 정책으로 본토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고 자부해온 영국이 충격에 빠졌다. 백주대로에서 극단 이슬람 추종자들이 군인을 참수한 ‘테러 살인’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으로 미국과 동맹국들을 노리는 신세대 자생적(home-grown) 테러리스트들의 위협이라는 국제사회의 우려가 재확인됐다.

 참극은 22일 오후 2시20분(현지시간) 런던 동남부 울위치에 있는 존윌슨 스트리트에서 일어났다. 20대로 추정되는 흑인 남성 두 명이 길을 걷던 젊은 남성을 차로 들이받았다. 이들이 쓰러진 피해자에게 다가갔을 때만 해도 행인들은 부상자를 도우려는 의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곧 칼부림을 시작했다. 현장에 있던 다수의 목격자는 “이들이 정육점에서 뼈를 토막 내는 데 쓰는 칼을 휘둘렀다” “장기를 꺼내려는 듯 난도질을 했다” “목을 자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전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과 텔레그래프 등은 목격자들을 인용해 범인들이 계속해서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다고 보도했다.

 참전 용사들을 돕는 자선단체의 티셔츠를 입고 있던 피해자는 런던 시내에서 모병 행사에 참여한 뒤 부대로 복귀하는 현역 군인이었다고 영국 언론들은 보도했다. 사건 발생 장소는 왕립 포병대 기지 인근이었다. 이 기지 소속 탱크 부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에 파병된 바 있다.

 잔혹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시신을 도로 한복판으로 끌어내 던지더니, 피해자가 제물이라도 되는 듯 옆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목격자들은 말했다. 범인들이 벌채용 칼과 큰 식칼, 손도끼와 리볼버 권총을 들고 있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이들은 흥분한 듯 거리를 서성이더니,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행인들을 향해 사진과 영상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범인 중 한 명은 피에 젖은 손에 칼을 들고 행인의 휴대전화 카메라를 향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위대한 알라께 맹세컨대 당신들이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 이상 우리도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당신들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여성들이 이런 광경을 보게 해서 미안하지만 우리 땅의 여성들은 매일 이런 광경을 보고 있다”며 “당장 군을 철수시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범인들은 현장에 출동한 무장 경찰들을 향해 달려들다가 총에 맞았다. 텔레그래프는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범인들이 경찰과 정보기관에 이미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이번 사건은 최근 각국 정보 당국이 주목하고 있는 ‘신세대 테러’의 요건을 고루 갖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인터넷 등을 통해 이슬람교리와 테러 수법 등을 익 힌 자생적 테러리스트로 의심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디언은 범인 2명 모두 나이지리아계 영국 시민권자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영국 언론들은 특히 범인 중 한 명이 런던 출신의 평범한 학생이었던 마이클 아데볼라조(29)이며 약 10년 전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다고 전했다. 또 입장을 밝히는 형식이나 내용 등을 볼 때 조직과 연계돼 있기보다는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외로운 늑대(lone wolf)’에 가깝다는 것이 현재 영국 정부의 판단이다. 정교한 무기가 아니라 칼처럼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도구를 사용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텔레그래프는 이런 신세대 테러범은 ‘나이키 테러범’이라고 불린다고 보도했다. 나이키가 광고 슬로건으로 사용했던 ‘그냥 행동하라(Just Do It)’가 바로 이들의 행동지침이라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테러는 사실상 사전 적발과 예방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큰 공포를 조장한다. 드론을 띄워 아라비아 반도에 숨은 테러조직의 수뇌부를 제거하는 미국식 대테러책도 무슬림 단체와 협력해 시민권 획득을 돕는 영국식 정책도 효과가 없다. “보스턴마라톤 테러와 이번 사건으로 미국 CIA와 영국 MI5 등 각국 정보기관이 두려워하던 악몽이 현실화하고 있다”고 텔레그래프는 설명했다.

 한편 무장 경찰이 현장 출동에 20분이나 걸린 데 대해 거센 비판이 일고 있다. 그 사이 상황을 진정시키려 노력한 것은 시민들이었다. 한 여성은 피해자의 시신 옆에 앉아 재킷으로 얼굴을 가려주고 손을 잡은 채 현장을 지켰다. 버스를 타고 가던 여성 잉그리드 로요 케네트(48)는 경찰 도착 전까지 대화를 통해 범인들을 자신 곁에 붙잡아두며 추가 피해를 막았다. 케네트는 이들에게 “당신은 혼자이고 우리는 여러 명이다. 결국 당신이 패배할 것”이라고 말하며 무기를 건네 달라고 설득을 시도했다고 BBC 등은 전했다.

유지혜·정종훈 기자

◆끊이지 않는 영국 내 이슬람 테러

2005년 7월 7일 런던 지하철 연쇄 자살 폭탄 테러로 용의자 4명 포함 56명 사망, 700여 명 부상

2007년 1월 31일 버밍엄에서 무슬림 영국 군인을 납치·참수하려는 테러 계획 발각. 9명 체포

2007년 6월 30일 글래스고 국제공항 터미널 차량 폭탄 테러. 용의자 1명 사망, 5명 부상

2008년 5월 22일 엑세터 레스토랑 폭탄 테러로 용의자 1명 부상

2013년 5월 22일 런던 흉기 테러로 영국 군인 1명 사망. 용의자 2명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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