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야스쿠니와 알링턴이 같다는 아베의 궤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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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망언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이번에는 야스쿠니 신사를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비유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있다. 그는 미 외교전문매체인 포린어페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인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미국인이 알링턴 묘지를 참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추악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를 전몰장병이 묻혀 있는 신성한 국립 추도시설과 동일시하는 궤변이다.

 아베는 알링턴 묘지에 미국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 군인들도 안장돼 있음을 지적하고, “노예제도에 찬성했던 이들에게 참배한다고 해서 노예제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는 미 학자의 말을 인용했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고 해서 그곳에 합사(合祀)돼 있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까지 추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들린다. 일제 침략으로 피해를 입었던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이 일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A급 전범 합사 논란을 비껴가려는 꼼수다.

 패자까지 추도하는 알링턴과 달리 야스쿠니는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내란의 패자들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메이지 정부에 반대해 일어난 세이난(西南)전쟁의 주동자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위패는 야스쿠니 어디에도 없다. 야스쿠니에는 메이지 시절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확립과 팽창에 기여한 군인과 군속들의 위패만 봉안돼 있다. 알링턴이 국민통합과 화해의 상징이라면 야스쿠니는 전사자를 현창(顯彰)하는 군국주의의 상징일 뿐이다. 아베가 야스쿠니와 알링턴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무지가 억지와 만난 결과다.

 야스쿠니는 전사를 명예로 찬미하는 곳이다. 전선으로 향하는 병사와 가족들에게 “전사하면 신(神)이 돼 야스쿠니에 모셔지는 영광을 누린다”고 세뇌했다. 병사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며 목숨을 바쳤다. “천황이 주신 목숨을 천황에게 바쳤으니 그보다 더한 명예가 없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군국주의 일본의 국교인 ‘야스쿠니 신앙’이다. 전쟁을 기리는 야스쿠니에서 평화를 기원한다는 건 모순이다. 야스쿠니가 국립 추도시설이라고 우기는 것은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다.

 야스쿠니에는 A급 외에 B, C급 전범들의 위패도 있다. 이들은 전선에서 실제 잔학 행위를 저지른 침략 실무자들이다. 이들의 범죄도 결코 가볍지 않다. A급 전범을 야스쿠니에서 분사(分祀)한다고 야스쿠니 문제가 해결될지 의문이다. 오히려 ‘야스쿠니 신앙’의 자유로운 포교 활동을 조장할 우려가 크다.

 도쿄에는 1959년 국가가 운영하는 시설로 건립된 지도리가후치(千鳥ケ淵) 전몰자묘원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국외에서 사망한 일본 군인과 민간인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골들을 봉안한 납골당이다. 야스쿠니와 달리 종교적 색채가 없는 곳이다. 아베가 굳이 전몰자를 추도하고 싶다면 이곳에서 하거나 총리 공관에서 침략전쟁의 피해자를 위한 추도식을 거행하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