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영어강의 허용 놓고 프랑스는 갑론을박 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7면

프랑스에서는 ‘e-mail(e메일)’이라는 용어가 금지돼 있다. 2003년 정부에서 그 대신에 ‘courriel(쿠리엘)’이라는 단어를 공식 용어로 지정했다. 프랑스어 ‘courrier(우편)’와 ‘electronique(전자)’의 합성어다. 실제로 공무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명함에 e-mail로 표기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정부의 지침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고유명사를 제외한 영어를 간판이나 상점 진열창에 쓰는 것도 위법이다. 따라서 ‘coffee’나 ‘book’ 같은 간단한 단어도 거리에서 볼 수가 없다. 이를 어기면 상점 주인이 벌금을 물어야 한다. 방송에서 외국 영화나 드라마는 반드시 프랑스어로 더빙을 해야 한다. 인기 ‘미드(미국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모두 프랑스인 성우의 목소리로 포장된다. 극장에서 외국 영화는 더빙판과 자막판을 따로 상영해 관람객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모국어 사랑이 각별한 프랑스에서 요즘 대학의 영어 강의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프랑스 사회당 정부가 이달 초 대학에서 영어 강의를 허용하는 법안을 하원에 제출한 게 발단이다. 1994년에 만들어진 영어 사용 금지법을 개정한 법안이다. 그렇다고 영어 강의를 전면적으로 허용하자는 것도 아니다. 외국 기관과 연계된 수업 또는 유럽연합(EU)에서 지원하는 학부 수업에 한해 영어 강의를 할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다. 현행법상으로는 외국 초빙 교수에 한해서만 영어 강의가 가능한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 과학·기술이나 경영학 분야 등에서 상당수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고 있다.

 법안은 준비에브 피오라조 고등교육 담장 장관의 발의로 추진됐다. 영어 교사 출신인 그는 “영어 수업을 금지하는 한 대학에 외국의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기가 힘들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도에 6000만 명의 컴퓨터 전공자가 있는데, 프랑스에 유학 중인 인도 학생은 통틀어 3000명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외국 유학생들이 점점 줄고 있다.

 법안이 제출되자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40인의 지성인 모임인 한림원(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하원의원들에게 법안 거부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야당인 대중운동연합(UMP) 소속 하원의원 40여 명도 법안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고 프랑스24 방송은 보도했다. UMP의 다니엘 파스퀠 의원은 “과학 기술 분야에서 프랑스어의 말살을 불러올 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프랑스의 대학은 충분히 경쟁력을 갖고 있으며, 여기는 영어 배우러 오는 곳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언론에서도 논쟁이 치열하다. 일간지 르몽드에는 연일 찬반 양론의 기고가 실리고 있다. 콜레주 드 프랑스대의 교수 클로드 하제제는 “영어 강의 허용은 정부가 국가 보호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프랑수아즈 바레시누시(2008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와 세르주 아로슈(201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등 과학자들이 “법 개정은 학술·연구 분야에서 프랑스의 매력을 키우는 긍정적인 일”이라고 르몽드에 반박 기고문을 보냈다. 법안 표결은 22일 실시된다. 프랑스 하원은 집권당인 사회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통과가 유력하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