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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에세이] 무통 롯실드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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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AD 70년에 나라를 잃은 뒤 1948년 이스라엘을 재건하기까지 유대 민족은 1천9백년 가까이 차별과 박해의 고난을 견뎌왔다.

오늘날 이 소수 민족은 높은 교육열이 뒷받침돼 정치.경제.예술 각 분야에서 유감없이 성가를 높이고 있는데 특히 국제금융계에서 유대 자본의 강력한 영향력은 잘 알려져 있다. 앞 회에서 언급했던 로트실드가(Rothschild)가 바로 거대한 유대 금융자본의 원조격이다.

18세기 후반에 유대인 청년 마이어 로트실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골동품과 외환거래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후 다섯 아들을 프랑크푸르트.빈.런던.로마.파리등 5대 도시에 정착시켰다.

이후 강력한 금융자본으로 19세기 유럽 각국의 정치.경제를 좌우했다. 당시 유럽에선 부의 상징으로, 또한 투자대상으로서 고급 와인과 포도밭의 인기가 높았다.

이에 따라 런던에 정착했던 마이어의 셋째 아들 네이선이 1853년 보르도의 포도밭을 사들인 뒤 샤토 무통 로트실드로 개명했다. 파리에 자리잡은 막내 제임스는 15년 후인 1868년 루이 15세가 애음했던 샤토 라피트 로트실드를 비싼 값에 구입했다.

그러나 당시 최상급 와인으로 평가받던 샤토 무통 로트실드는 1855년 등급구분 심사에서 제 1급(Premier Cru)을 받지 못하는 불운을 당해 1973년 정부로부터 승급 승인을 받을 때까지 2급 와인의 자리를 지키는 수모를 받아야만 했다.

샤토 무통 로트실드의 격상은 1922년 와인 분야의 천재라 할 필립 로트실드 남작이 20세의 나이에 샤토를 물려받은 뒤 포도나무의 선별, 배수, 토질개량 등 품질 향상에 주력한 결과 이뤄졌다. 특히 그는 그때까지 보르도 시내에 있는 전문업자가 담당해온 와인을 병에 넣는 작업을 샤토에서 직접하도록 결단을 내렸다.

나무통에서 와인을 숙성시킨 후 먼곳까지 운반하면 운반 과정의 흔들림 때문에 와인이 나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샤토의 지하에 큰 저장고를 만들어 와인을 이상적인 상태에서 보존, 숙성하도록 한 것도 그의 노력의 결과였다.

필립 로트실드 남작은 와인병의 라벨도 예술적으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제1급으로 승격한 1973년엔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 라벨을 장식했는데 매년 바뀌는 이 라벨은 무통 로트실드의 매력으로 자리잡아 와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샤토 무통 로트실드가 최상급 와인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어느 프랑스 와인보다 카베르네 소비뇽(포도의 일종)의 비율을 높여 짙은 색조와 풍부한 타닌 맛이 뚜렷하다. 이같이 힘차고 남성적인 맛은 그 어느 와인도 흉내낼 수 없는 무통 로트실드의 특징이다.

최근 자매품(Second Label)으로 르 프티 무통(le Petit Mouton, 적포도주)과 엘 다르장(Aile d'Aregent, 백포도주)을 내놓았다. 또 포이약(Pauillac)의 제5급 와인인 샤토 다르마이약과 샤토 클레르 밀롱도 직영하고 있다.

김명호 한국은행 전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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