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규 "농협금융, 제갈공명이 와도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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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지난 1년 동안 속이 새까맣게 탔다. 지치고 힘들었다.” 전화로 들려오는 신동규(62) 농협금융지주 회장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그는 15일 저녁 본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임기를 1년여 남기고 갑자기 사표를 던져야 했던 복잡한 심경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사표를 낸 이유는.

 “경영이 자유롭지 못했다. 농협중앙회와 갈등도 있었다. 농협 지배구조로 봤을 때는 농협금융은 제갈공명이 와도 안 된다.”

 -전산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산사고는 감독당국이 나한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만하자. 더 말하면 사람이 치사해진다.”

 신 회장이 직접 밝힌 사퇴 배경은 농협중앙회의 경영 간섭과 갈등이다. 신 회장은 평소에도 사석에서 “농협금융 회장은 아무것도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불만을 자주 토로했다. 농협지주와 금융계열사 경영에 대해 최원병 농협중앙회장의 간섭과 간여가 있었고, 신 회장은 이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불화의 배경엔 농협중앙회와 농협금융지주의 기형적인 지배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 3월 출범한 농협금융은 농협중앙회가 100% 지분을 갖고 있다. 중앙회가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는 한 농협금융은 독립경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실제로 중앙회는 농협금융의 인사와 예산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 회장은 엄연히 지주회장이면서도 지주의 계열사인 은행·보험 등에 대한 인사권을 충분히 행사하지 못했다. 법 규정도 모순적이다. 농협금융은 금융지주회사법을, 농협중앙회는 농협법의 규제를 받는다. 금융지주회사법에는 지주회사가 자회사를 관리하고 그룹의 경영전략을 세우도록 명시돼 있다. 반면에 농협법에는 중앙회가 자회사와 손자회사까지 지도·감독하도록 돼 있다. 이런 모순된 법과 제도는 최 회장과 신 회장이 사사건건 충돌할 수밖에 없는 토양이 됐다. 게다가 중앙회장은 조합원들의 투표로 뽑힌 선출직인 반면, 지주회장은 사실상 중앙회가 선임한다. 농협금융 회장을 두고 ‘정치인이 대주주로 있는 자회사의 대표’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신 회장 사퇴에 대한 정부의 공식 설명은 “올 들어 발생한 전산사고와 관련해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다. 무엇보다 농협금융이 사용하는 전산망을 관리하는 곳은 농협중앙회이기 때문이다. 전산망은 농협중앙회 소유다. 농협금융 관계자는 “지난해 농협금융지주 출범 때 전산망이 마련되지 않아 중앙회와 3년간 전산시스템 위탁 계약을 맺었다”며 “이 때문에 농협금융지주는 IT전산망과 관련해 아무런 권한이나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최 회장이 신 회장의 사퇴를 압박하거나 종용했는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중앙회 관계자는 “전산사고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고 해서 사표를 받고 할 정도는 아니다”면서 “신 회장이 법적 책임은 없지만 고객들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점에서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상렬·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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