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축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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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인간의 악기 중에서 종소리만큼 많은 청중을 갖고 있는 악기도 드물 것이다. 온갖 종소리 중에서도 가장 장엄하고 감명 깊은 것은 묵은해를 올려 보내는 제야의 종소리이다.
어떤 음색의 종소리이든, 그것은 우리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든다. 그러고는 곤히 잠든 의식들을 하나씩 흔들어 깨운다. 지나간 1년의 가치를 이제서야 눈을 비비며 깨닫게된다.
지난 원단에 결심한 일들은 무엇이었나. 지금 생각하면 『실행한 것이 3분의1, 실행하지 않은 것이 3분의1, 나머지 3분의1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조차 나지 않은 3분의1!』임어당은 그래도 3백65일의 30%는 값있게 보낸 성실가이다. 이게 우리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 것」 으로 가득 넘쳐 있는 것은 아닐까.
실로 실행하지 않은 것이 3분의1, 실행하지 못한 것이 3분의1, 나머지 3분의1은 아득히 기억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지나간 시간은 언제 회상해도 이처럼 허망하기 마련인가.
우리는 그럴수록 가는 해의 등을 밀어 버리기 쉽다. 영영 벼랑으로 떨어뜨려, 이런 해가 다시는 기어오르지 말기를 빈다. 행복의 순간은 빛살처럼 빠르고, 불행한 시간은 얼마나 길고 어두운가. 그렇게 생각이 되는 것이 우리의 상정이다.
그러나 순풍에 돛단 듯이 인생을 꾸벅꾸벅 졸며 영겁으로 흘러가는 물결에 떠있고 싶지는 않다. 어느 누구나 오수처럼 인생을 보내고는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포도를 짓이겨 술을 담그듯, 불행을 차곡차곡 여미며 결국은 그 불행들의 발효 속에서 인생의 향기와 은근한 취기를 맛보는 것은 아닐까.
마음의 평정은 온실 속의 꽃송이와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바람과 소나기와 서리와 추위를 견디며 자라는 초목들의 꽃이 훨씬 더 향기로운 법이다.
이제야 우리는 머리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의 의미와 불행처럼 생각되는 그 많은 일들의 교훈을 우리는 지금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자, 그러면 우리는 1968년을 맞는 유쾌한 후보자로 살아 남은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넘치는 축배를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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