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왕은 알고 있었다 …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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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난다고 무조건 배트를 휘둘러선 안 돼. 공을 잘 걸러 다음 타자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한 거야.”

 일요일이었던 지난달 21일 오후 경기도 성남 국군체육부대 운동장. 야구 연습을 하고 있는 초·중학생 30여 명 사이로 덩치 큰 어른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양준혁(44) 전 프로야구 선수. 2011년 야구재단을 설립해 청소년야구단을 운영 중인 그는 이날도 휴일을 반납한 채 직접 아이들 훈련에 나섰다. 오후 내내 팔꿈치가 다 까질 만큼 뛰고 구르며 힘든 훈련을 거듭했지만 아이들 눈빛엔 열정이 넘쳤다.

 양준혁이 운영하는 야구팀은 서울·성남·양주 등 총 3곳. 선수들은 모두 다문화·저소득층 가정 아이들이다. “처음엔 힘들었죠. 부모의 보살핌이 부족한 아이들이라 그런지 오히려 의존성이 강했어요. 신발끈이 풀려도 엄마가 매 주기 일쑤였고요.” 그는 2년 전 첫 훈련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제일 먼저 대중교통을 이용해 훈련장에 혼자 오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자립심을 길러 주기 위해 인근 지하철 8호선 장지역에서 훈련장까지 30분 정도를 걷게 했다.

지난달 21일 양준혁 전 선수가 다문화·저소득층 가정 아이들로 구성된 멘토리야구단원들과 훈련에 앞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성남=김상선 기자]

룰 통해 협동·배려·신뢰 중요성 가르쳐

 평소 생활습관도 바꾸게 했다. 컴퓨터게임 줄이기, 하루 한 시간 책상에 앉아 있기 등 매주 약속을 정해 훈련 때마다 체크했다. 못 지킨 학생들은 야단을 치기보단 야구의 룰을 예로 들며 신뢰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지난 2년간 아이들은 야구 실력만큼이나 인성도 좋아졌다. 처음엔 공과 방망이를 먼저 잡으려고 싸우던 아이들이 이젠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한다.

 엄마가 중국인인 정창민(12·성남 상탑초6)군은 “조금만 기분 나빠도 친구들에게 화를 냈는데 지금은 안 그런다”며 웃었다. 나이지리아인 아빠를 둔 한현민(13·서울 보광초6)군은 피부색이 달라 처음엔 놀림받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야구팀의 ‘인기남’이다. 오히려 현민이의 큰 키(1m68㎝)와 유연성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도 가난했지만 운동하며 바르게 성장

 이처럼 ‘홈런타자’ 양준혁이 아이들의 인성교육 스승이 된 연유는 뭘까. 야구 한국신기록만 9개, 최고의 타자로 프로구단 감독 같은 평탄한 미래가 보장돼 있었지만 그는 남다른 길을 선택했다. 2010년 위기 청소년 등 선수가 아닌 일반 학생 1000여 명이 참가한 청소년야구대회를 개최한 것이 계기였다. 대회가 끝난 뒤 ‘꿈이 생겼다’ ‘모범생이 됐다’ 등의 사연이 담긴 수백 통의 편지가 그의 앞으로 배달됐다. “인생의 새로운 길을 봤죠. 야구로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어릴 때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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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시절 양준혁에게 야구는 열정이자 스승이었다. 초등학교 때 당시 고교 선수였던 사촌형 양일환(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을 바라보며 야구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글러브조차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가 가방가게를 했는데 불이 세 번이나 난 겁니다. 단칸방을 전전하며 살았죠. 하지만 전 동성로(대구)에 나가 동냥이라도 해 야구하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했습니다.” 사촌형이 쓰던 글러브를 얻어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간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가 됐다. 중·고교 시절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았지만 그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성실함이었다.

 야구는 그가 비뚤어지지 않고 곧은 길로 걷게 해 준 이정표이기도 했다. 고1 때 코치와의 불화로 훈련장을 이탈한 그는 대구에서 마산까지 무작정 시외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에 타자마자 연습 걱정이 떠나지 않더란다. 터미널에 도착해 바로 돌아오는 차편을 끊었다. “화를 참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좋은 선수가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보다 팀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팀 위해 희생 필요한 포볼 가장 값진 기록”

 9개의 신기록 중 가장 아끼는 게 뭐냐고 물었다. 돌직구처럼 돌아온 양준혁의 대답은 ‘사사구(四死球)’였다. 홈런왕에게 포볼과 데드볼 기록이 최고라니 의외였다. “때리고(배팅) 싶은 욕심이 왜 없겠어요. 하지만 팀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죠. 참을 수 있어야 선구안(選球眼)도 생기고 좋은 공을 거를 수 있습니다. 진짜 홈런타자는 사사구에서 나옵니다.”

글=윤석만·이한길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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