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세돌 말처럼 … 활짝 핀 김지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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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천재’ 김지석 9단(오른쪽)이 이세돌 9단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GS칼텍스배 결승에서 이세돌을 3 대 0으로 꺾은 뒤 복기하는 모습. [사진 한국기원]

초등학교 2학년인 김지석이 평창동 조훈현 9단의 집에 들어온다. 조 9단은 딱 한 명, 이창호라는 제자를 키웠고 이창호 9단은 스승을 누르고 일인자가 됐다. 바둑계는 아직 이창호 전성시대. 조 9단은 이창호 스타일의 천재 말고 자신을 닮은 천재를 한 명 키우고 싶었다. 그렇게 선택받은 김지석이다. 하지만 김지석은 열흘을 못 채우고 떠난다. 조 9단의 부인 정미화씨는 이렇게 말한다. “창호는 7년여 살면서 발자국 소리 한 번 내지 않았어요. 창호는 정말 특이했지요. 지석이는 온갖 장난을 치며 아래위 층으로 뛰어다니는데 그만 혼이 나갈 것 같았어요. 창호와는 정반대였어요. 도저히 힘들 것 같아 포기하자고 남편을 설득했어요.”

 광주(光州)로 다시 내려간 김지석은 3년 후 프로가 된다.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 것과 달리 입단도 조금 늦었고 프로 세계에서도 발군의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불굴의 ‘전투바둑’으로 인기가 높았고 2009년 첫 우승을 따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4년 후배인 박정환에게 연패를 당하자 김지석에 대한 기대감은 차츰 사그라졌다. 김지석은 2008~2011년 사이 2년6개월 동안 박정환에게 무려 7연패를 당했다. 통산 전적은 3승9패. 바둑계의 황태자 자리는 자연 박정환으로 굳어졌다.

 석 달 전 이세돌 9단이 “포스트 이세돌이 누구냐”란 질문에 돌연 “김지석”이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예상과 크게 벗어난 대답이었지만 일인자의 한마디는 미묘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김지석은 상승세를 타며 랭킹이 3위까지 뛰어올랐다.

 22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GS칼텍스배 결승 5번기에서 김지석은 이세돌을 3대0으로 완파하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세돌 9단이 결승에서 3대0으로 진 것은 23번 치른 5번기 사상 처음이다. ‘꽃미남’과 ‘전투’로 이름 높았던 김지석에게 다시 시선이 집중됐다. 천재도 늦되는 수가 있는 것일까. 이세돌의 안목이 현실이 된다면 김지석은 이세돌의 뒤를 이어 일인자가 될 것이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다음은 김지석과의 일문일답. 김지석은 이번 우승으로 63번째 9단이 됐다.

 -다시 보기 힘든 격렬한 전투 끝에 3판 모두 이겼다. 팬들도 푹 빠져들었다. 이세돌 9단 말고 다른 기사도 이렇게 싸워 주나. 전투로 이세돌을 압도했다는 점에 팬들이 놀라고 있다.

 “이렇게 싸우는 기사는 이세돌 9단 외엔 없는 것 같다. 너무 재미있어 바둑에 푹 빠져들었다. 실수도 많았다.”

 -사람들이 다시 김지석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바둑이 업그레이드됐다고 생각하나.

 “예전보다 바둑판을 폭넓게 보려고 애쓴다. 기량보다 마음 상태가 조금 편해진 건 있다.”

 -이세돌 9단이 박정환을 제쳐 놓고 김지석을 후계자로 꼽았다.

 “고마웠다. 그 말이 큰 힘이 됐다. 열심히 하면 되겠구나 생각했고 눈앞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박정환에게 많이 져 천적 소리도 들었는데 앞으로 만난다면 승부는 어떨 것 같은가.

 “실력을 떠나 후배기사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지난해 마지막 대국에서 연패를 끊었다. 대국심리 면에서 전과는 다를 것이라 확신한다.”

 -세계대회가 궁극의 목표일 텐데 지난해 중국리그에서 10전10승을 거둔 것은 큰 힘이 될 것 같다. 계약조건도 좋아졌나.

 “국내기사는 동료 같은 느낌이고 중국기사를 만나면 전의가 끓어오른다. 중국리그는 저장(浙江)팀 소속인데 조건이 좀 좋아졌다.”

 -어린 시절 조훈현 9단 집에 갔던 에피소드는 기억하나.

 “첫날 기보 2, 3판 놔본 것 말고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장난감이나 게임 기구 등 신기한 게 너무 많아 형이나 누나들 따라 정신 없이 놀았던 기억이 있다”(조 9단에겐 김지석보다 약간 위인 1남2녀가 있다).

 -신혼 생활은 어떤가(89년생 김지석은 지난해 12월 세 살 위의 박민정씨와 결혼했다).

 “처음엔 어떻게 사는 건지 걱정이 많았는데 금방 적응이 됐다. 아내가 잘해 준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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