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금 발표' 사전각본 있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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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감사원이 현대상선의 2억달러 대북 송금 사실을 발표한 것은 치밀하게 기획된 각본에 따른 것이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설 연휴를 이틀 앞둔 29일 밤 한 인터넷신문이 이 사실을 보도한 뒤 30일 이종남(李種南) 감사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조사내용을 보고했다. 곧바로 金대통령이 '대북경협 사법심사 부적절' 언급을 하고, 감사원이 조사 내용을 발표하는 수순으로 진행됐다.

30일 金대통령이 대북 지원금이 남북 정상회담과는 관계 없는 경협자금이며, 통치행위였음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청와대는 이종남 감사원장의 보고에 앞서 수석회의를 긴급소집했다. 그런 뒤 청와대 관계자들은 "감사원 발표를 기다려보자"며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임동원 청와대 통일특보의 최근 방북도 대북 정지(整地)작업을 위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30일 "林특보는 북측 수뇌부에 이번 사건의 공개가 불가피하다는 사정을 설명하고, 이것이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盧당선자 측의 이종석(李鍾奭) 인수위원이 동행한 것은 이것이 김대중 정부뿐 아니라 차기 정부도 이에 공감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한 조치였다는 추측이다.

대북 송금 사실을 29일 밤 첫 보도한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는 이를 제보한 여권 고위 인사가 "林특보가 평양에서 돌아온 뒤 보도해달라"고 주문했다고 밝힌 것도 대북 송금과 林원장 방북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사실 대북 송금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북한 측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남북관계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소재다. 따라서 북한과의 조율이 필요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성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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