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년 전 청일전쟁의 기억 … 지금 한국은 어디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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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국은 현재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이 모두 강대국이라는 보기 드문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중일의 충돌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지난해 8월 16일 중국 상하이의 일본영사관 앞에서 한 중국 여성이 전날 센카쿠 열도에 상륙했다가 일본에 체포된 중국인들을 석방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왼쪽) 같은 날 일본 도쿄의 한국대사관 앞에선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항의하는 일본 우익단체 회원의 시위가 있었다. [상하이·도쿄 로이터=뉴시스]

위험한 이웃, 중국과 일본
리처드 C 부시 지음
김규태 옮김, 에코리브르
655쪽, 3만5000원

이제까지 우리의 눈과 귀를 붙잡아 온 지구촌 대결은 기존 강국 미국과 신흥 대국 중국 사이의 패권 경쟁이었다.

 체제와 이념이 다른 두 대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역사적으론 항상 신구(新舊) 세력간의 충돌이 불가피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더 의존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동안 이와 관련한 논쟁이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그러나 미·중은 큰 덩치만큼이나 성숙한 모습으로 양국 관계를 잘 관리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적절한 견제와 관여를 병행하는 ‘봉쇄적 개입(congagement)’ 정책으로, 중국은 미국과 다투기는 하되 그 관계까지는 깨지 않는다는 ‘투이불파(鬪而不破)’의 대책으로 말이다. 오바마와 시진핑(習近平) 시대를 맞아서는 두 나라가 ‘신형(新型) 대국관계’를 지향 중이다. 서로의 핵심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협력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 책은 동북아에서의 충돌이 미·중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일에 의해 촉발될 공산이 더 크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으로 한평생 아시아 문제에 천착해 온 리처드 C 부시는 ‘하나의 산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 없다(一山不容二虎)’는 중국의 속담을 수 차례 인용하며 중·일의 충돌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

 과거 우리는 중·일 관계를 분석할 때 흔히 양국 지도자의 개성에 초점을 맞추곤 했다.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같은 이가 일본 총리가 되는 건 곧 중·일 관계의 경색으로 해석됐다.

지난해 9월 25일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센카쿠 열도 해역에서 대만 순시선과 일본 순시선이 물대포를 쏘고 있다. [센카쿠 로이터=뉴시스]

 장쩌민(江澤民) 치하의 중국도 대일 강경 방침을 고수했다. 베이징 외교가의 소식통에 따르면 장은 두 나라 손님은 꼭 자기가 만나야 된다고 고집했다. 첫째는 미국 손님으로, 자신이 영어를 잘해서다. 둘째는 일본 손님으로, 반성할 줄 모르기에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장은 청년 시절 항일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의 개에 팔을 물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시는 그러나 이 같은 지도자의 개성보다 양국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충돌의 가능성을 살피고 있다. 이 책의 원제가 ‘근접성의 위험(The Perils of Proximity)’이듯이 중·일은 이웃해 있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충돌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싫다고 짐을 싸 이사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지 않은가.

 지리적 충돌의 개연성이 가장 높은 마찰 지점으로 부시는 네 곳을 꼽는다. 현재 중·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는 센카쿠(尖角, 중국명 釣魚島) 열도와 유전과 가스전이 포진한 동중국해,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할 때 통과하면 편리할 일본의 해협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만이다. 이중 센카쿠 열도와 동중국해에서의 충돌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그는 말한다.

 부시는 일단 이들 지역에서 발생한 마찰이 어떻게 에스컬레이트 되는지를 중·일 두 나라 군대의 전략 문화, 정치의 의사결정 체계, 국내 정치 상황 등을 상세하게 비교 검토해가며 설명한다.

 베이징의 전략 문화를 보면 중국은 전통적 의미의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더라도 분쟁에 뛰어드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익이라고 여겨지면 과감하게 분쟁에 뛰어 든다. 일본은 자국에 가까운 분쟁일수록 공격적 성향을 보인다. 양국 모두 군사작전 수행에 있어선 평화주의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일단 충돌이 발생할 경우 양국 모두 국내의 민족주의 정서를 통제하기 어렵다. 갈등이 발생한 위기 현장에서의 일차적인 관계 악화, 이에 대한 그릇된 정보의 유포, 대중의 격분 등이 혼합돼 양국 지도자의 판단이 흐려지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는 것이다.

 중·일이 충돌할 경우 미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본과 동맹 관계인 미국은 일본에 대한 의무와 핵을 가진 중국과의 전쟁이라는 위험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이를 예방하기 위한 중국과 일본의 호전성 모두를 억제하는 ‘이중억제’ 정책을 펴 왔다고 부시는 말한다.

 부시는 중·일 충돌을 막기 위한 몇 가지 제언을 내놓고 있다.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 문제 등 구체적 쟁점에 대한 해결, 과거사에 대한 화해, 군비 경쟁 완화 등. 물론 하나 같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토를 달면서다. 태평양 건너 부시의 말에선 여유가 느껴진다.

 그러나 중·일과 이웃한 우리에겐 절박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두 나라가 우리의 수역인 풍도 앞바다와 우리의 땅인 평양에서 맞붙었던 청일 전쟁이 내년으로 120주년을 맞는다. 또 그 때처럼 무기력하게 두 나라의 패권 다툼을 하릴없이 지켜볼 수는 없지 않은가.

 부시는 해적 퇴치 등 제한된 목표에서부터 중·일 신뢰를 쌓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중심이 돼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아이디어다. 우리는 현재 이웃인 중국과 일본이 모두 강대국이라는, 보기 드문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찾는 데 있어 부시의 제안은 꽤나 참고적이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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