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번째 저작은 시집 '팔방미남' 김영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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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스스로를 "초개 눌인(草芥 訥人)"이라 부른다. 지푸라기처럼 하찮고 모자란 사람이란 뜻이다. 그의 혜화동 작업실.김상진 기자

머리카락이 빠져 흉하다며 한사코 모자를 벗지 않은 칠순 시인은 여성용 벨벳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이 무슨 고약한 취미냐’는 눈초리를 지으며 넌지시“신발이 특이하네요” 했더니, 아이마냥 배시시 웃어보인다.

“무용계에선 다 아는 일이죠. 노인네 혼자 사는 아파트에 여자 신발만 그득하다고. 그래서 여러번 입방아에도 올랐다우. 하지만 어쩌겠소. 발이 235㎜ 밖에 안되는데….”

그러고 보니 손도 조그맣다. 새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혜화동 작업실에서 만난 김영태(70.사진) 시인은 기억에 남을 정도로 손발이 작았다. 손발이 작으면 재주가 많다는 옛말은 그를 두고 한 말인 듯싶다. 이번 시집 '누군가 다녀갔듯이'(문학과지성사)는 그의 다섯번째 시집이자, 물경(勿驚) 55번째 저작이다.

단언컨대 그는 종합예술인이다. 그것도 한 세대 이상을 활약해온 만능예술인이다. 홍익대 서양학과에 입학해 붓을 든 게 1958년이고, 다음해엔 '사상계'에 시를 냈고, 무용평을 맨처음 발표한 건 1969년이다. 이후 그는 발레 공연장에서, '문지'시집의 표지 그림에서, 미술 전시회장에서 시도때도 없이 나타났다. 그가 날카로운 펜으로 표현한 인물 소묘는 900장이 넘고, 자신의 내면을 무덤덤하게 그려낸 시들은 현대문학상(1972년) 등 여러 문학상을 받았고, 각종 무용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도맡아 왔다. 발 담그는 분야마다 그는 소위'성공'을 거뒀다.

하여 이제는, 마침 칠순도 맞았으니 쉴 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미쳤던 차였다. 한데 시집이 또 나온 것이다. 노년의 여유로움을 노래하나 싶었는데, 시는 영 딴소리다. 말하자면 그는 아직 한참 멀었단다.

'시인은 일흔부터라는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어느새 나는 종점에 와 있다. 여기까지 와서 보니 장식이었다. 조그맣게 헐겁게 지나쳤던 선들이 이 끝에 묻어 있다'('시인의 말').

시집에서 시인은 '일흔 살 청춘'('옛날 현대문학사'에서)이다. '칠십인데 청바지 입고 다니니?/그렇다.'('캐주얼'에서)며 고함치기도 하고, '새 옷을 입혀도/헌 옷 같은 몸이 있다/내 몸 치수에 맞는 몸이여/얼마나 이쁘냐, 이쁘고 뜨거우냐'('늘그막에'에서)며 시들지 않은 청춘을 으스댄다.

그러나 현실의 시인은 휑한 머리를 감추려 연방 모자를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자꾸만 시가 짧아진다. 힘이 달려 긴 시가 안되는 것 같다"고 투덜댄다. 하지만 시인의 이번 말은 틀렸다. 토해낸 시어는 크게 줄었지만, 참아낸 시어는, 그러니까 시어 사이의 여백은 훨씬 크고 강렬하다.

손민호 기자
사진=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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