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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와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빨간 색은 사람을 흥분시키고, 파란색은 진정시키고 하는 따위의 심리적인 작용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그러나 색채에다 더 추상적인 의미를 붙이기 시작하면 혼선이 일어나기 쉽다.
해방 후 언젠가 영화제목이 말썽 난 일이 있다. 「모이라·샤라」가 진홍색 구두를 신고 춤추는 영화의 원명은 「빨간신」. 그러나 빨갱이와 통한다고 해서 기어이 「분홍신」으로 고쳐진 일이 있다. 「빨간 구두 아가씨」를 거리낌없이 노래부르는 요즈음 유행인 지라, 생각 나름이라는 감이 새삼 느껴진다.
그러나 상징과 의미를 결부시키려는 미신에 가까운 집념은 아직도 살아 있다. 청색이 동양에서는 고래로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에, 청와대를 고쳐 불러야 한다는 논이 나돌아, 여러 지식인에게 질문서까지 돌린 일이 있었다. 고지식한 사람들은 또 자기 나름의 고견을 펴느라 열중하고. 하마터면 서울 거리에서 청색이 자취를 감출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모두들 할 일이 없는 모양.
요즈음 또 하나 생긴 말썽은 백색에 관한 것. 행정백서가 한창 유행하더니, 이번에는 국회의 통일백서가 나왔다. 백이 맞는다느니, 청이 옳다느니 하는 분론이다. 말의 유래는 영국. 행정부나 국회가 일반에 발표하는 공식보고서의 표지를 백색으로 했기 때문에 백서라 부르고, 국회의 특별연구위원회 것은 청표지로 했기에 청서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르기 쉬운 비공식 명칭. 제목에 백서니, 청서니 하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국회국토통일문제연구특별위원회 보고서」가 혀 꼬부라질 정도로 길다고 해서 본제를 통일백서라 한 것은 좀 이상하다. 더욱이 영국식을 충실히 따르자면 청서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알고 쓰자는 말 뿐. 영국에서도 특위의 보고서에 붉은 표지를 씌우는 일도 있고, 번문욕례의 연원인 공문서의 빨간 끄나불도 사라졌다. 사람이 색깔에 붙인 의미에 사람이 거꾸로 사람이 사로잡히지만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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