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남편과 이혼 50대女, 퇴직연금 어떻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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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주부 A씨(57·여)는 1981년 공무원인 B씨(60)와 결혼했다.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B씨는 결혼 기간 자주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A씨는 고심 끝에 결혼 30년 만인 지난 2011년 ‘황혼이혼’을 결심하고 소송을 제기했다. B씨도 더 이상 함께 살기를 원치 않아 소송은 일사천리로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재산분할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B씨가 2008년 은퇴 후 매달 받고 있는 240만원가량의 공무원 퇴직연금을 나눠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다. B씨는 “죽을 때까지 받는 퇴직연금은 앞으로 얼마를 더 살게 될지를 몰라 금액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재산분할 대상이 아니다”는 논리를 폈다.

 서울고법 가사1부(부장 이광만)는 A씨 부부의 이혼소송에서 “공무원 퇴직연금도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된다는 1심의 판단이 정당하다”며 “B씨가 앞으로 받는 퇴직연금액 중 절반을 매월 말일 A씨에게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무엇보다 퇴직금과의 형평성을 주요 판단근거로 내세웠다.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할 때는 재산분할 대상이 되는데 연금으로 받는다고 해서 나눠줄 수 없다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A씨의 내조를 바탕으로 B씨가 공무원 생활을 한 점도 고려했다. 또 국민연금의 경우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이혼한 배우자에게 돈을 나눠줄 수 있게 돼 있는 점도 참작했다. 진현민 서울고법 공보판사는 “이혼 시 재산을 분할할 때 실질적인 형평을 기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은 기존 대법원의 판례와 어긋난다. 대법원은 97년 “이혼소송에서 앞으로 받게 되는 공무원 퇴직연금은 원고의 여명(남은 수명)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분할액이 달라질 수 있어 분할대상 재산에 포함시킬 수 없다”고 판결했다. 다만 재산분할 비율을 정하면서 퇴직연금을 받지 않는 쪽이 더 유리하도록 사정을 감안하도록 했다.

2006년에도 “국민연금에 이혼 배우자를 배려하는 조항이 있다고 해서 퇴직연금이 반드시 재산분할 대상이 돼야 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하지만 서울가정법원 등 하급심에선 이 같은 대법원 판례가 바뀌는 추세다. 2011년 가정법원 가사4부(부장 한숙희)는 처음으로 퇴직연금도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된다고 판결했다. 이 사건은 양측이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수원지방법원 가사2부(부장 정승원)도 지난해 6월 같은 취지로 판결했다. 이번에 서울고법도 고등법원으로는 처음으로 퇴직연금이 재산분할 대상이 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 판결은 피고 측이 상고해 앞으로 대법원에서 심리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판례 변경 움직임에 대해 “노령화 시대와 연금생활자가 많아지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태어난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1.2세로 계속 높아지는 추세다. 갈수록 기대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연금생활자가 많아지고 퇴직연금 수령액도 커지고 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해 퇴직연금을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시키는 게 공평하다는 인식이 가사 전문 법관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얘기다. 가사소송 전문인 태평양 임채웅 변호사는 “기존 대법원 판례대로 하면 재산분할 비율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아 한쪽이 불리해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이번 판결은 매달 받을 수 있는 금액을 확정해주기 때문에 보다 공평한 재산 분할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박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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