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는 '소소익선(少少益善)', 적으면 적을수록 좋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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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과를 마치고 의대 본과에 진급하여 처음으로 해부학 실습을 시작할 때였다. 몇 달 전부터 선배들한테 오리엔테이션도 받았고 마음에 준비를 하였지만 처음 몇 주간은 몹시 힘이 들었었다.

첫 실습 날, 학생들은 누르스름한 광목으로 지어진 실습 가운을 입고 줄지어 실습실에 들어갔다.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찌른다. 돌로 만들어진 긴 테이블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그 위로는 허연 형광등 불빛이 테이블 위의 무엇인가 비닐에 쌓인 것을 비추고 있었다. 카데바(cadaver), 해부할 시신들이었다. 조별로 각자 정해진 테이블 곁에 둘러섰다. 교수님들과 교목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한 말씀씩 하시면서 해부 시작 전의 간결하고 엄숙한 예식을 진행했다.

그 날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구체적인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시신들의 명복을 빌었고, 여기 해부에 참여하는 의학도들이 귀중한 지식을 얻어서 장차 인류의 건강과 생명을 구하는 훌륭한 의사들로 성장하게 해달라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교목 선생님께서는 한 가지를 덧붙이셨다. 올해는 특별한 시신이 한 구 더 있으니, 얼마 전 돌아가시며 모교에 시신을 기증하신 어느 교수의 숭고한 결정에 대한 칭송과 애도였다.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시신 훼손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문화가 있다. 오죽하면 죽은 사람의 시체를 파헤치는 부관참시라는 형벌이 있었겠는가? 그래도 지금은 사회적 인식들이 달라져서 사후 시신 기증을 하나의 의미 있는 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1988년 당시에는 시신 기증이란 극히 드문 일이었고, 그래서 해부에 사용되는 시신들은 거의 무연고 행려자의 시신이었다. 무연고 행려자란 일종의 버린진 시신으로서, 생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해부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끔은 한참 해부가 진행되고 있는 학기 도중에 시신의 가족들이 나타나서 너덜너덜해진 시신을 수거해가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 학년에 배정된 시신은 총 열여섯 구였는데 모두 행려자의 시신이었고, 단 한 구만이 그 기증된 교수의 시신이었다. 시신들은 포르말린에 잠겨 오랫동안 절여진 후에 해부대에 오른다. 피부는 뻣뻣한 갈색 기름종이처럼 변한다. 피부를 절개하고 들어가 신경을 찾고 근육을 확인하고 혈관의 경로를 추적하고 장기들의 모습과 관계를 파악한다. 모든 조직을 차례로 들어내고 나면 맨 나중에 뼈와 관절이 남는다.

대개의 경우 행려자 시신들에는 피하지방층이 거의 없다. 살아생전 잘 먹지 못했기 때문인지, 몸에 기름이라곤 없다. 피부를 절개하고 들어가면 바로 조직들이 드러난다. 해부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하지만, 교수의 시신이 배정된 6조는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그 이유는 지방층이 겹겹이 너무 많아서 해부하는 한 단계 한 단계가 기름과의 전쟁이었다. 더구나 포르말린은 두터운 지방층에는 잘 스며들지 않아서 한 겹 재낄 때마다 지방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곤 했다.

버려진 행려자의 삶과 성공한 교수의 삶, 지방층의 두께만큼이나 극명히 적나라하게 대조된다. 많은 것, 과잉한 것, 축적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의료과잉의 배경에는 공급과잉, 꽁돈주의, 근거주의, 의사들의 성과주의와 공명심, 미디어의 비판 없는 부추김, 첨단을 찾는 환자들의 기대와 불안, 허영심 등이 복합적으로 섬세하게 얽혀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리 저리 휩쓸리지 말고 내 스스로 중심을 잡고 소신 있게 행동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있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 많게, 감사하는 일이 많게, 배움이 많게, 즐겁게 까르르 웃는 일이 많게. 하지만 지나친 의료는 경계하는 게 좋겠다. 소소익선(少少益善),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검사가 적게, 약이 적게, 시술이나 수술이 적게. 그리고 내 몸에 지방이 적게.

* 김현정 박사
- 서울시립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의사는 수술 받지 않는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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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기자 okafm@joongang.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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