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카이스트가 사는 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오피니언 리더들 가운데도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카이스트는 충남 대덕단지에 있는 대학이고, 키스트는 서울 홍릉에 있는 연구소다. 두 기관이 한때 합쳐졌다가 다시 분리된 일이 있어서 더 헷갈릴 것이다.

이 혼란이 바로 정체성을 잃은 카이스트의 진면목이라고 빗대는 사람도 있다.

카이스트는 1970년대 초 개발경제시대에 이공계 인력 양성과 산학 연계를 위해 정부가 만든 특수목적대학이다. 병역면제와 장학금 지급, 산학지원금 등 대단한 혜택이 주어졌다. 그런 만큼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산업현장에서 대학교수.직업관료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에 좋은 인재들을 대거 배출했다. 오늘날 벤처기업의 원조들이 여기서 탄생했다. 이제는 과거지사가 돼 버렸다.

장기간 전략 부재를 드러내며 여느 대학들처럼 '보통화'의 길을 걷다 자신의 특성을 잃고 만 것이다.

카이스트는 지금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고들 말한다. 비록 덜거덕대는 소리는 들리지만 외국인 노벨상 수상자를 총장으로 영입하면서까지 변신하려 하는 모습도 애절하다. 그러나 온갖 보호막이 벗겨진 채 유수 대학들과 진검승부를 해야 하는 일이 간단할 리 없다.

다행히 카이스트가 몸을 추스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대학의 생산성 문제와 사회책임론이 여론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라 전체 석.박사 고급인력의 70%가 대학에 있고, 국가연구개발비의 20%를 차지하는 기초연구비의 대부분을 대학이 쓰고 있는 마당에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일이다.

대통령이 '대학은 산업' 이라고 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대통령의 진의는 대학이 반드시 산업체에 맞춤인재를 제공하고, 상업화 기술을 내놔야 한다는 게 아닐 것이다. 대학이 상아탑에 갇힌 채 더 이상 사회적 요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러플린 총장도 얼마 전 "공대의 존립 근거는 기술적 트레이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에게 기업가 정신, 개척자 정신, 유연성을 길러주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공계 교육도 시장 역학에 반응해야 한다는 뜻이다. 카이스트는 기초연구.응용연구 등 연구개발의 모든 단계를 갖추고 있다. 산학 연계도 어느 곳보다 많은 경험과 실적을 갖고 있다.

미국은 90년대 전 지역에 대학중심의 산업 클러스터를 만들어 성공적인 경제발전을 일궜다. 정부는 대학들이 ▶지적재산을 만드는 기능▶비즈니스를 만드는 기능▶지역을 만드는 기능 등 세 가지 기능을 반드시 갖도록 했다. 대학을 중심으로 한 '기술기반 경제발전'을 추진한 것이다. 카이스트는 이 세 가지 기능을 다 갖추고 있다.

카이스트는 실력가들이 모인 양산박이다. 강한 신소재 분야에, 남이 하지 않는 생산기술과 기술경영 분야, 한창 뜨는 산업디자인 등이 포진하고 있다. 하나의 가정이지만 같은 대덕에 있는 ICU (한국정보통신대학교)까지 합친다면 카이스트의 종합력과 분야를 넘나드는 시너지 효과가 돋보일 것이다. 특히 마이크로경제 분야에서 국립대학끼리 대협력 자세를 보여주고, 유비쿼터스 사회를 선도해 나간다면 그 영향력은 막대할 것이다. 재해방지 등 위기관리 기술, 웰빙 및 실버 기술, 식품안전 및 의약기술 등 목적지향형의 '사회기술'도 카이스트가 붙잡을 필요가 있다.

대덕밸리에는 800여 개 벤처기업이 있는데 이 중 매출 100억원을 넘는 게 16개사다. 벤처생태계가 호순환 구조로 가고 있다는 증거다. 카이스트는 그 생태계의 중심에 서야 산다. 우선은 카이스트의 비전을 제시할 리더십을 찾는 게 급하다.

곽재원 경제연구소 부소장

*** 바로잡습니다

3월 31일자 중앙포럼 기사에서 ICU는 한국정보통신대학원대학이 아니라 '한국정보통신대학교'이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