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보는데 나만 안 보면 바보 되는 세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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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호 21면

2년 전 ‘트랜스포머3’가 국내 개봉했을 때 ‘한국이 할리우드를 빼고 전세계에서 가장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잘 되는 나라’라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 1편은 미국을 빼고 전세계 1위, 2편은 2위(영국)와 거의 차이가 없는 3위였다. 이유에 대해선 “변신로봇에 열광하는 남성들의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이란 식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90%를 웃돌던 ‘괴력’의 예매율이 충분히 설명된 건 아니었다. 최근 13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둔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면서 그때가 떠올랐다. 얼마 전 이 영화의 흥행 요인을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2월 17일자 중앙SUNDAY S매거진)이란 식으로 썼지만, 이 정도까지 관객이 드는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컬처#: 문화 편식증

일러스트 강일구

‘7번방의 선물’ 흥행과 더불어 더 놀라운 사실은 한국 영화의 ‘파천황’에 가까운 흥행이다. 이제 2013년이 겨우 석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7번방의 선물’ ‘베를린’ ‘신세계’ 등 한국 영화 3편이 동원한 관객만 2300여만 명에 달한다. 이들 덕에 한국 영화 점유율은 지난달 80%를 넘었다. 극장에 온 관객 10명 중 8명이 한국 영화를 봤다는 얘기다. 애국심 때문에?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웬말인가. 한국 영화가 독보적이어서?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극단적인 쏠림 현상이 명쾌하게 설명되진 않는다.

가장 그럴듯하게 들리는 의견은 사람들의 불안 심리가 밴드 웨건(band wagon) 효과를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일으켰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의 고공흥행은 불안감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심정적으로 여유가 없다 보니 주류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현재 1, 2위를 달리는 화제작에만 몰리도록 하는 것 같다”(원동연 리얼라이즈 픽쳐스 대표, 영화 ‘광해’ 제작자). 나도 남들의 대열에 어떻게든 끼어야 한다는 동조 심리가 심화되면서 ‘지금 제일 잘나가는’ 문화상품 소비를 부추겼다는 거다.

‘3초백’ ‘5초백’을 유행시킨 데서 알 수 있듯 한국인들의 동조 심리는 이미 입증된 바 있지만, 경제양극화가 심해진 요즘 문화 콘텐트 소비에서 이런 쏠림이 나타나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다. 멘토 열풍, 힐링 열풍의 요인과도 상통한다. 불안하니까 위로받고 싶고, 불안하니까 누군가의 조언을 찾게 된다. 불안하니까 문화상품 소비에서나마 주류의 흐름과 같이 가고 있다는 소속감을 갖고 싶어한다. ‘남들만큼 살고 있다’는 위안을 그런 데서 찾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짠해지기도 한다.

‘문화 편식’은 책 소비도 마찬가지다. 한국만큼 베스트셀러에만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는 나라도 없다는 게 출판인들의 하소연이다. 하버드대 간판을 건 마이클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가 110만 부나 나갔지만 한두 장 읽은 뒤 책장에 고이 모셔놓거나 중고서점에 내놔 조용히 처분했다는 뒷얘기가 들려온다. 100만 부 넘게 나갈 대중서가 아닌데 대부분 남들 산다니 덩달아 샀기 때문이다. 서점에 나가 찬찬히 살펴보며 내 취향의 책을 고르기보다는 남들이 얘기하는 책 제목을 적어놨다가 인터넷 서점에서 ‘표적구매’ 하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이런 쏠림 현상을 너무나 잘 아는 업자들은 초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사활을 건다. 인지도를 높이는 데 마케팅비를 쓸 여력이 있는 경우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소리 소문 없이 묻힌다. 영세 출판사, 독립영화 등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구조다.

문화 편식 현상은 우리가 ‘좁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60%를 넘은 정보기술 강국에서의 삶은 그만큼 남들이 뭐하고 사는지에 대해 예민한 더듬이를 갖고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실종된다. 내 취향은 사라지고 타인의 취향만 남는, 지루하고 피곤한 사회로 가고 있단 뜻이다. 글은 이렇게 쓰고 있지만 사실 나도 이렇게 개탄하려니 좀 찔린다. 위의 세 영화를 모두 본 데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구입해 몇 번 뒤적인 뒤 책장에 잘 모셔놓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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