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동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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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감정이 예민하다는 것과 신경이 예민하다는 것과는 엄청난 표면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대체로 현대인은 신경이 예민한 편에 속했으면 속했지, 감정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의 기계문명은 인간의 정신을 기능적인 면에서 측정하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것으로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시종한다. 따라서 감정-특히 고전적인 「뉘앙스」로 해석할 정서의 면은 소외된 지 오래다. 징서도 구극은 육체의 기능이고 보면 그것은 퇴화의 길로 달릴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그 퇴화한 것의 공백을 무관심과 안일주의가 도사리고 앉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인에게도 가끔 퇴화한 것의 복귀를 위한 자극은 있다.
나는 그 자극의 가장 강한 것으로 계절을 생각하는 것이다. 계절 가운데서도 겨울을 생각하는 것이다.
동굴에서, 움 속에서 살던 때의 버릇인지 겨울은 특히 밤에 그가 가진 맵싸한 맛을 풀어놓는다. 화루불에 밤을 묻고 할머니의 옛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어릴 적 우리들 겨울로부터, 입학시험에 시달리는 것으로부터, 혹은 차가운 길거리의 고아로부터, 폭넓은 영역에 걸쳐 겨울은 우리의 감정과 정서에 사무치는 계절이 되어있다.
겨울의 추위를 경멸하기 위해서 맨발로 눈펄을 거닐고 냉수를 끼얹는다는 글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서 읽었다. 그러나 현실을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 기계이전에 인간이 향유하던 모든 감정과 정서를 마이동풍으로 외면하고도 출세하고 뭣하고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겨울-그것을 대면하는 인간의자세가 기계처럼 무표정할 수 없고 겨울을 말하는 인간의 언어가 소박한 공감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음은 추위는 만인에게 뼈 속까지 파고 들고야 마는 투철한 생리가 있기 때문일까? 모든 계절에 마이동풍 하더라도 겨울 앞에서는 마의동풍하는 것일까? 곽복녹<서강대교수·독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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