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속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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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정변경」에 탄력 있는 적응
한·일 국교가 이룩되자 일본은 첫걸음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선지 적극적인 「대북괴접근」을 시도했다. 일정한 북괴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한·일 관계를 구축해 놓아야 「사정변경의 원칙」에 보다 탄력성 있게 적응할 수 있다는 외교감각에서였는지 모른다.
조약이 발효한 바로 열흘 뒤인 12월28일 일본정부는 북한지역을 다녀오겠다는 조총련계 재일교포 3명에게 재입국「비자」를 발급함으로써 조총련이 현안문제로 추진해왔던 정치공작인 이른바 「조국왕래」의 길을 텄었다.
그런가하면 2월 5일엔 이른바 「사절단」10명에 대하여 목적지 난을 「평양」이라고 적어 넣은 여권을 발급하게 이르렀다.
북한지역을 기류지로만 취급해 오던 것을 처음으로 「직접」목적지로 다룬 것이다. 그리고 지난 7월12일엔 외국인등록증의 국적 난에 「한국」이라고 된 것을 「조선」으로 고치겠다는 「니이가다」(신석) 재일교포 23명의 신청을 한꺼번에 받아들였다.

<북괴기술자입국 예외로 인정시도>
「적립방식」에 좇은 일본의 대북괴접근을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적 마찰은 지난 7월15일 일본정부가 총59억원 규모의 「아크릴」섬유 「플랜트」 및 가소제「플랜트」의 수출에 따른 북괴기술자 3명의 입국을 「예외적으로 인정한다」고 결정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수출조건이 3년 연불이었던 이 상담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①무역·기술관계자의 자유왕래 ②장기 연불방식의 실현이라는 일본과 북괴사이의 「본격적 교역」을 위한 관문을 한꺼번에 더 놓는 경제적 효과와 「정경분리」에 입각한 북괴와의 관계의 지보를 굳힌다는 의미에서는 정치적 효과를 아울러 지닌 것이었다.

<효과 올리게 된 조직적 저지책>
북괴기술자의 입국문제는 평가받을만한 한국측의 조직적인 저지책이 주효하여 「메이커」들이 모두 발주를 포기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입국문제의 자연해소는 한낱 한 상담의 해소에 그치지 않고 전반적으로 일본과 북괴사이의 접근 「무드」를 냉각시키는 정치적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증발」로 표현되고있는 입국분쟁의 자연해소는 일본정부의 어떤 원칙적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일본의 장삿속의 학점(한국과의 교역이 당장엔 더 아쉽다는)을 찔려 부득불 손을 떼게 된 말하자면 「케이스·바이·케이스」의 한 「케이스」가 유산된 데 지나지 않는 다는 「한계」를 지니고있다.
한국의 반응을 지켜보며 「백지상태」(북괴와의 관계를 규정한 일본측의 정치적 표현)의 북괴와의 관계를 확충하겠다는 일본의 기본자세는 그대로 온존되고 있는 것이다.

<미중공대결 배경 소련권 접근기도>
지난 8월12일 「북평로선」과의 결별로 풀이되고있는 북괴의 이른바 「자주독립선언」은 일본과 북괴사이의 접근을 촉진시키는 한 「객관정세」가 될 수도 있다는데서 주목된다. 대미관계를 기조로 한 일본은 미·소 공존과 미·중공 대결을 배경으로 대중공 접근과는 달리 대소접근, 나아가서는 대소련권 접근은 비교적 쉽게 추진시킬수 있는 입장에 있다.
북괴의 이른바 「자주선언」이 북평의 「혁명로선」에서 「모스크바」의 공존노선으로의 전환으로 굳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세의 변화에 따라서…』(석정전법상의 국회답변) 대북괴관계를 촉진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대북괴 접근은 전반적인 냉각을 빚으면서도 새로운 조건을 배경으로 둘째 해를 맞게된 것이다. 【동경=강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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