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간 세대라 깔보지 마라, 우린 문화적인 인간들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대 입구에 클래식 다방이 네 개 있었어요. 이삭, 빅토리아, 빠리, 까치 다방, 이렇게 네 개였는데 이대 앞에 클래식 다방 하면 다 알아요. 음악 좋아하는 연대생이나 서울대생도 많이 왔죠. 그 다방마다 특징이 있어요. 저는 이삭을 많이 갔는데 주인이 상업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의자도 스폰지가 다 벗겨진 채 놔뒀고…….

클래식 좋아하는 사람만 오든지 말든지, 그런 태도였죠. 디제이도 따로 없고 매니아들이 와서 음악 틀고 그랬어요. 아침에 학교 가면 홍차 50원이었는데 책가방 놓고 수업 듣고 공강시간에 거기 와서 또 음악 듣고 그랬어요.”

위의 말을 듣고 “아, 그랬었지.”하며 옛 추억을 되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 구려”하며 진저리를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이 이른바 ‘세대 차이’라는 것일 테다. 음악평론가이자 음악프로 전문 구성작가인 진회숙씨의 『클래식 오딧세이』(청아출판사)는 단연코 ‘구린’ 쪽의 책이다. 하지만 진회숙씨는 그 구린 세대야말로 정말 문화를 사랑한 세대가 아니었냐며 반문한다.

문화를 사랑했던 구린 세대들
“취직한 선배가 학교에 오면 그 선배한테 다 얻어먹고 그랬어요. 돈이 별로 없으니까 막걸리에다 김치 안주만 먹었죠. 모여서 음악 얘기, 문학 얘기, 춤 얘기를 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이 너무너무 그리워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은 참 문화적인 사람들이었어요. 고급문화에 대한 향수같은 것도 있었죠.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라흐마니노프의 2번이 좋다는 건 외우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클래식 음악에다 옛 향취가 나는 양념을 골고루 버무린 진회숙씨의 글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클래식 오딧세이』에는 음악 얘기 뿐 아니라 어린 시절의 고향 이야기, 젊은 시절 썼던 소설 이야기, 감명깊게 봤던 영화 이야기 등 ‘구린’문화가 총집결돼 있다. 낭만주의 예술의 절정을 보여줬던 슈만의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낭만적 문장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습작소설을 인용하는가 하면 에릭 사티의 소나티네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처음 피아노 배우던 때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

그러니까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음악평론집이자 음악을 생활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진회숙씨의 생각이 100퍼센트 반영된 글들이다.

하지만 ‘너무 가벼운’요즘 세대가 싫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돈을 쫓아 움직이고 ‘교양이 없는’ 것이 요즘 세대들의 특성이긴 하지만 희망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희망에는 단서가 붙는다. ‘어떤 문화적 교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회숙씨는 딸과의 대화에서 확신을 얻었다.

“예전에 양희은이나 김민기 노래를 틀어주면 ‘이거 완전히 뽕짝이잖아’ 그랬어요. 근데 얼마 전에 김민기와 클래식의 만남이란 공연을 딸이랑 같이 봤거든요. 얘가 좀 있다 보니까 계속 울고 있는 거예요. 내가 흉볼까봐 고개를 숙이고 몰래 운 거지. 자기들말로 ‘엄마한테 쪽팔리니까’말예요. ‘봉우리’라는 노래를 듣더니 ‘엄마, 저거 다 내 얘기야.’그러더라구요.

그 이후로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애들이 그런 문화를 접해볼 수가 없으니 비교할 수도 없잖아요. 최신가요도 좋지만 그런 노래들도 함께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죠. 문화적으로 교화시켜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걸 주고 그 중에서 고르게 만들어야죠. 요즘 애들은 거의 동물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해요. 전반적으로 음악성도 높고 말예요. 최고급 문화를 줘도 아마 동물적으로 받아들일 거예요. 그런데 그런 애들한테 너무 안주는 거야.”

‘문화적 교화’는 진회숙씨의 교육관과도 일치하는 얘기다. 도대체 음악이라는 과목에 교과서가 왜 필요하며 준비물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얘기다. ‘예술이란 함께 즐기는 것이어야 한다’는 지론은 그의 생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유쾌한 것은 진회숙씨가 노래방 매니아라는 점이다.

‘긴 복도에 양쪽으로 작은 방들이 늘어서 있는 게 꼭 변소깐 같다’는 남편의 말에 진회숙씨는 옳다구나 맞장구를 친다. 노래방이란 것이 원래 배설의 문화라는 것이며 그 배설의 문화를 꺼릴 필요가 뭐 있느냐고 반문한다. 진회숙씨는 노래방의 핵심이 ‘에코 들어간 마이크’라고 한다. 그런 경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목욕탕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스스로에게 ‘가수 해도 되겠다’는 자화자찬을 내뱉던 기억. 에코 들어간 마이크와 목욕탕 효과는 같은 이치다.

“노래방 너무 좋아해요. 왜냐하면 노래가 너무 잘되잖아요. 요새는 ‘코러스’도 수준급으로 나오잖아요. 내 18번이 ‘애모’인데 노래 부르고 나면 속이 후련해요. 노래방이 배설의 문화라고 하는데 정말 배설이지. 그런데 배설해야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배설을 안하고 살어? 학교 다닐 때도 정해진 식순에 따라서 한 명씩 일어나서 노래하잖아요. 난 그거 참 좋은 민족성인 것 같아요.”

왜 주변부만 건드려요. 핵심을 봐야지.
진회숙씨는 예술이 생활화만 된다면 바흐와 드보르작도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며 섣부른 크로스오버들이 유치하게 들릴 것이라고 한다. 국악과 재즈의 만남, 국악과 클래식의 만남 같은 ‘음악 대중화 작업’에 진회숙씨는 불만이 많다. 왜 핵심을 보여주지 않고 주변부만 건드리느냐는 항변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국악이 대중화가 되면 재미없게 들리던 판소리도 흥겨워질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진회숙씨는 절대 아니라고 말한다.

“생활과 밀접해지고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알 수 있는 게 고급문화의 특징이랄 수 있죠.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고 해서 대중적으로 만든다는 건 웃기는 일이에요. 수준을 폭력적으로 끌어내릴 것이 아니라 높여 줘야죠. 클래식이 위기란 말을 많이 하지만 클래식은 역시 클래식인 것 같아요. 클래식은 결국 살아남지 않을까요?

이번 『클래식 오딧세이』는 일종의 예고편 같은 거예요. 다음에는 비슷한 형식으로 국악관련 에세이를 펴낼 거예요. 판소리나 국악이 얼마나 고급한 예술인지를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저력이 있는지 나라인지 모두들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문화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거예요. 이제 21세기잖아요. 21세기.”
(김중혁 / 리브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