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unday] 닫힌 사회, 한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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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호 35면

미래창조과학부 초대 장관 후보였던 김종훈 전 벨연구소장이 4일 사퇴하고, 이튿날 한국을 떠났다. 복잡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홀연히 떠난 김 후보에게 아쉬움이 남는다. 어렵더라도 검증의 파고를 넘어 우리 사회에 신선한 비전을 제시해주길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단지 정보통신기술(ICT) 융합 등 현안만이 아니다. 급속히 다문화·다인종화하고 있지만 혈통·애국심·국가주의 등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함께 고민할 기회가 사라져서다.

 김 후보가 직면했던 가장 큰 질문은 ‘정체성’이었다. 다시 말해 김 후보자에게 ‘당신은 누구냐, 어느 나라 사람이냐’를 밝히라고 요구한 셈이다.

 김 후보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억울한 질문이다.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릴 때 이민을 갔고, 최선을 다해 살아오던 과정에서 자연스레 미국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또 한국으로 돌아올 때 국적을 회복할 것이라고 미리 밝혔다. 더 이상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혈통·국적 문제에 대해 유별난 감정을 갖고 있다. 개인의 능력이나 인품, 성과를 따지기 전에 ‘우리냐 남이냐’부터 따지는 인식의 틀을 벗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의 배경에는 애국심이나 혈통은 순수한 것이어서 ‘다른 것’과 섞이면 훼손된다는 인식이 은연중에 숨어 있다. 억측이 아니다. 저명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이론가인 캐나다의 정치철학자 윌 킴리카(Will Kymlicka)는 “국가주의자들은 사람들이 개성을 발현하고, 외국의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게 되면 애국심이 줄어든다고 우려한다”며 “다른 게 끼어들면 애국심이 줄어드는 식의 제로섬 게임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가주의가 흔히 전체주의로 이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며 나온 말인데, 우리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은 글로벌 경쟁 시대다. 경험과 능력이 있는 인재라면 하나라도 더 찾아내야 하는 게 한국의 살길이다. 가뜩이나 좁은 인력 풀 속에서 ‘능력도 탁월하고 글로벌한 경험을 갖췄지만, 혈통은 순수하고 국적이 바뀐 적 없는’ 사람을 골라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김 후보자에게 기대했던 것은 바로 이런 모순을 드러내고, 국적·혈통 등의 외양보다 능력·경험·실적으로 진정성을 입증하는 모습이었다.

 김 후보자의 출국을 보면서 문득 수백만 명에 이르는 재외 동포, 특히 동포 2, 3세들의 심정이 염려됐다. 제아무리 뛰어난 성과를 내도, 모국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아야 한다면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게 되지 않을까. 눈을 돌려 우리 사회에서 묵묵히 함께 살아가는 조선족 동포나 결혼이주·귀화자, 북한 이탈주민들의 입장이 돼 보자. 김 후보 같은 ‘수퍼 엘리트’조차 정체성을 이유로 차갑게 외면하는 ‘닫힌 한국 사회’를 그들은 어떻게 볼까. 자신의 2세를 바라볼 때에는 또 어떤 심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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