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껍질 속에 숨은 시의 자궁, 혹은 무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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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란 언어의 몸과 내통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몸의 언어를 언어의 몸과 교미시킨다. 모든 언어가 그렇듯 시인 역시 지난하고 깊은 사유의 결과물들을 언어로 표현한다. 아니, 이 말은 약간 틀렸다. 시인은 사물들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인은 언어가 아닌 것들, 그러니까 언어 바깥의 사물과 언어가 내포하는 의미들 사이에서 한없이 진동하는 생명체들을 낳는다. 그건 금시초문의 어떤 것처럼 보이지만, 삶과 죽음의 질료들을 한 껍질 안에 접붙인, 우주의 표식들이다.

시인은 언어의 몸과 내통한다
이성복 시인의 산문을 읽는 건 시의 비밀이 감춰진 해부도를 펼치는 것과 같다. 단단하고 세밀한 알갱이로 빛나던 시들이 그 응결된 빛과 튼실한 결정의 속내를 물살처럼 열어 젖힌다. 그건 마치 과밀했던 언어의 감옥에서 한꺼번에 출소돼 나온 언어의 수인들 같다. 그만큼 자유롭고, 자유로운 만큼 위험스런 방만함이 배어있다. 그러면서 어딘가 쑥스러운 듯,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조심스러움도 잃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자기 할 말은 다 한다. 또는, 어찌해도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궁극을 그 불가능성 자체로 드러내 보여준다. 이런 도저한 모순은 그러나 어떤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시인들이란 논리의 반대극에서 논리의 심급을 난자하는 족속이다. 그러니 말이 안 되는 걸 말 되게 하고, 전혀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면서 진리의 배면을 들춰낸다. 그런 시인의 모순은 무한반복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뒤집기’(p.15)의 원인과 결과로 나타난다.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문학동네) 는 이성복 시인이 1990년 출간했던 산문집『꽃핀 나무들의 괴로움』(살림)과 1994년에 간행됐던 『이성복 문학앨범』(웅진출판사)에서 가려낸 산문들을 그 이후에 발표됐던 글들과 한데 엮어 출간한 것이다. 일테면 오랜 글들을 새로이 헹구고 다려 새 옷을 입힌 셈이다. 그러나 해묵은 걸 재탕하는 느낌의 구린내는 나지 않는다.

이성복 시인의 옛 글과 요즘 글들은 긴 시간의 단면 속에서 부조돼 나온 시정신의 무늬들로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 새로 쓰여진 글들이 낡고 오래된 글들의 숨은 힘을 되살려낸다면, 오래된 글들은 변화한 시인의 사고들을 역상으로 비추는 거울로 작용한다. 따라서 성큼성큼 자동차와 테니스, 시와 사랑에 대한 담론들 사이를 오가는 발걸음이 한결같다. 그 큰 발걸음 사이에서 떠오르는 건 언어에 의해 비로소 투사된 시적 영혼의 그림자다.

그건 표현의 변화, 논리의 변증 따위를 한데 아울러 표면적으로 구획된 ‘세월의 습곡’과 ‘기억의 단층’들을 수많은 겹으로 엮어내고, 재배치한다. 때문에 이성복 시인의 산문을 읽는 건, 시인 스스로도 밝히고 있거니와, 양파껍질을 벗기는 일과도 흡사하다.

새롭게 헹구고 다린 오래된 글들
시인이 자가발생력 강한 언어의 자장으로 만드는 껍질들은 곧 시인 스스로가 벗기고 직면해야할 세계 심층의 ‘흑암’과 ‘무명’(p.188)의 전사체들이다. 또는, 그것을 가리고 현혹하는 언어의 미혹이다. 그런 미혹에의 이끌림과 시적 광명으로의 탈출을 동시에 감행하는 이중의 고뇌 속에서 시인의 산문들은 빛과 어둠 사이에 끼인 세계의 공동(空洞)지대를 탐색한다. 그곳은 삶의 어두운 절멸과 찬란한 환희가 공존하는, 시의 자궁이자 무덤이다.

시인은 말한다.

“시에 대한 일체의 장광설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쓰기는 시작된다.”(208쪽)

시인의 시선은 세계의 온갖 구석지고 습하고 냉기 어린 곳까지 두루두루 분방하게 돌아다닌다. 허나 그건 단지 시선만의 문제가 아니다. 온몸의 감각들로 체현된 정신의 촉수는 난반사하는 태양의 빛살처럼 시인의 본체에서부터 떨어져 나와 숱한 사물들을 건드리고 살피다가 다시, 시인의 영혼 속으로 귀환한다. 한 편의 시란 따라서 갖은 감각의 시련, 정신의 혼미 끝에 굵직하게 뽑혀 나온 숙변을 닮았다. 그렇듯 시의 향기는 인간 정신의 오래된 누적물들에서 발산한다. 그건 결코 곱고 따사롭기 만한 미향(美香)이 아니다.

이성복 시인은 그런 시의 속성을 두고 ‘끔찍한 아름다움’(194쪽)이라며 진저리친다. 진흙구덩이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시는 세계의 표층에서 명멸하는 온갖 장광설들의 진액만을 추려낸다. 그러니 시인은 자신이 ‘저질러버린’어떤 흔적들로부터 한없는 탈출을 시도한다. 누가 제가 싼 분비물 위에 퍼질르고 앉아 허위의 감로수를 마실 것인가. 시란 자신을 탄생시킨 지아비를 향해 치명적인 덫을 놓는다. 그리고 시인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럼에도 시인은 잘 써지지 않고 요원하기만 한 시의 본령 앞에서 기웃거리는 걸 멈출 수 없다.

얼음 위를 가듯 살살 걸어가야…
이성복 시인의 이번 산문집은 그런 방황과 성찰의 불연속적인 교차과정을 차분하면서도 고밀도로 응결된 문장들을 통해 용의주도하게 펼쳐 보인다. 그것을 따라가는 길은 그 특유의 느릿한 문체만큼 더디고 암담하다. 그러나 한번 좇기 시작한 시인의 뒷모습은 그 쓸쓸함만큼이나 단호하고 고혹적이다.

그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를 좇는 걸 멈출 수 없다. 그렇다고 성급히 내달려서도 안 된다. 출렁거리며 몸살을 앓는 육체의 언어들을 반듯하게 세운 척추 속에 몰아넣으며, 얼음 위를 가듯 살살 걸어가야 한다. 사방으로 튀는 감각들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음문(陰門) 앞에 집중시키며. (강정 /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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