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C "대통령 對日 대응 적절…최소 원칙 언급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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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독도 사태에 대한 후속 대응에 나섰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3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패권주의를 관철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한지 6일만이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사무처는 이날 '독도문제의 본질'이란 글을 '청와대 브리핑'에 게재해 조목조목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대한 반박을 펼쳤다. NSC사무처는 이글에서 "1904년 5월 일본은 러시아 극동함대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고종황제를 협박, 러시아로부터 울릉도 산림채벌권을 박탈했으며, 9월에는 울릉도 일부를 군용지로 강제 수용하고 망루를 설치했다"고 명기했다. NSC사무처는 특히 "일본의 독도 침탈은 무엇보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전략적 계산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추진돼 1904년 9월 군함 '신고'호가 독도를 탐문조사했으며, 11월에는 군함 '대마'호가 상륙, 망루 설치 가능성을 확인해 상부에 보고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 어부가 청원하는 기만적 형식을 통해 1905년 1월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 편입을 결정하고, 같은 해 2월22일 시네마현 고시를 통해 자국영토로 강제편입시킨 것"이라는 게 NSC의 정리다.

NSC는 "일본의 독도 강점은 일본의 한반도 침탈사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라며 "독도 문제의 본질이 일본의 식민지 침탈 역사를 극복하는 주권 회복의 문제인 만큼 차분하고 확고하게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NSC는 최근 한일관계에 대통령이 너무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일부의 지적에도 대응을 하고 나섰다. 역시 청와대 브리핑에 게재된 '한일관계 대통령 글 이렇게 작성됐다'라는 글에서 사무처는 "혹자는 대통령이 한발 물러서 있어야 하고 여지를 남겨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며 "그러나 본말을 전도시켜서는 안 되며, 대통령은 결코 흥정할 수 없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원칙을 언급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 "대통령 서한의 한 축은 단호한 대응이며, 다른 한축은 감정적 대응에 대한 경계와 자제였다"며 "이런 원칙이 어떻게 상황과 조건에 따라 버리고 후퇴할 문제인가"라고 반문했다.

최훈 기자

다음은 청와대 브리핑 전문이다.

<독도 문제의 본질>

지난 3월 16일 일본의 시마네현 의회는 소위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였다. '다케시마의 날'로 지정된 2월 22일은 100년전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강제 편입한 바로 그 날이다.

일본의 이러한 행위는 우리 민족의 해방의 역사를 부인하고 과거 침탈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독도는 국권상실의 시대에 우리의 영토 중에서 최초로 일본에 의해 불법 편입되었다가 1945년 해방으로 되찾은 우리의 땅이기 때문이다.

6세기 이래로 우리의 영토였던 독도가 일본에 의해 강제 편입되었던 역사적 경과를 살펴보면, 이 문제의 본질이 단순히 한.일간 영유권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의 주권회복과 직결된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904년 1월 발발한 러일전쟁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대륙진출을 위한 전쟁이었다. 일본은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사실상 조선 병탄에 착수하였다. 동년 2월 군사적 필요에 의해 조선의 토지를 임의로 수용할 수 있게 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3월에는 군용물자의 수송을 위해 경의선을 착공하였으며, 6월에는 서해안의 어채권을 강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미개간지 점유를 요구하였다. 또한, 8월에는 '한일협정서'를 체결하여 일본이 지명한 외국인 고문이 조선의 재정과 외교를 감독하는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1904년 5월 일본은 러시아 극동함대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고종황제를 협박해 러시아로부터 울릉도 산림채벌권을 박탈하였으며, 9월에는 울릉도 일부를 군용지로 강제 수용하고 망루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일본은 울릉도 속도(屬島)인 독도 편입에 나섰다.

일본의 독도 침탈은 무엇보다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전략적 계산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추진되었다. 1904년 9월 군함 '신고'(新高)호가 독도를 탐문 조사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군함 '대아'(對馬)호가 상륙하여 망루 설치 가능성을 확인하고 상부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은 어부가 청원하는 기만적 형식을 통해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 편입을 결정하고, 동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자국 영토로 강제 편입시켰던 것이다. 일본은 동년 8월에는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10월과 11월에는 해저전선을 부설하는 등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철저히 이용하였다.

이처럼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정에서 최초로 강점된 우리의 영토였다. 그리고 그것은 1904년 한일의정서, 1905년 을사늑약, 그리고 1910년의 한일합방 등 일련의 국권침탈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영유권 문제 차원을 넘어 역사의 땅인 것이다.

근대사에서 우리의 국토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의해 유린된 것은 1894년부터였다. 당시 일어났던 청일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상대국이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었기 때문에 동해와 독도 대신 황해와 아산이 수난을 겪었을 뿐이다.

일본의 침탈과정에서 비단 국토만 유린된 것이 아니다. 주한일본공사가 일본 낭인 등을 동원해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적 행위였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할 뿐이다.

요컨대 일본의 독도 강점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사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독도문제의 본질은 살아 있는 역사이자 주권회복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정부와 국민이 더욱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일본의 독도 침탈이 우리가 힘이 없거나, 경황이 없는 틈을 타서 반복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조선이 일본 군대의 점령 하에 있었던 무력했던 틈을 타서 독도를 강제 편입하였으며,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당시에는 우리가 한국전쟁으로 경황이 없는 틈을 타서 해방으로 회복한 독도를 다시 자국으로 되돌리려고 치열한 대미 로비를 전개하였다.

참여정부는 일본이 동북아의 미래를 함께 할 숙명적 동반자라는 인식 하에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자세로 한일관계에 임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의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정책이 모색되는 시기에 오히려 한일우정의 해를 무색하게 하는 독도 도발 행위를 더욱 강화했다. 이는 국제사회의 규범과 정의, 그리고 역사적 진실에 비추어 결코 옳지 못한 행위이다.

참여정부는 독도문제의 본질이 일본의 식민지 침탈 역사를 극복하는 주권회복의 문제라는 인식하에 차분하고 확고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다.

<'한일관계 대통령 글' 이렇게 작성됐다>

1. NSC 성명의 연장선

지난 18일 대통령은 조세형.최상용 전 주일대사, 문정인 동북아시대위원장 및 외교관련 부처 장관들과 만찬을 가졌다. 이날 회의에서는 일본 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 등 한일 간 현안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이뤄졌다.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한일 간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이러한 생각과 고민은 지난 3.1절 기념사에 상당부분 배어 있다. 철저한 진실규명 등 그간의 한일관계에 비해 다소 '이례적인' 수준의 언급을 한 것도 이 같은 고민의 결과다. 실제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와 관련, 수차례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7일 수석보좌관 회의 때는 직접 한일관계에 대한 메모를 준비해 의제로 제시했다. 범정부 차원의 대책기구 설치, 일본의 진지한 자세 전환 필요성 등이 장시간에 걸쳐 논의됐다. 다음주인 14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도 중심 의제는 역시 한일관계였다. 이날 저녁에는 관계장관전략회의가 소집됐다. '대일 신독트린'으로 불리기도 하는 17일 NSC의 상임위원회 성명은 이들 회의의 논의 결과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즈음 대통령은 부속실을 통해 NSC에 "외교관련 회의를 될 수 있으면 자주 소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8일 관련부처와 전 주일대사, 동북아시대위원장 만찬도 이 같은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이날 모임을 계기로 그간 구상단계에 있던 '한일관계 관련 국민에게 드리는 글'의 집필에 착수했다.

글을 정리하면서 대통령은 계속 의견을 듣고 토론과 협의를 이어갔다. 21일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도 절반가량이 독도 문제와 관련한 토론으로 채워졌다. 돌아보면 수석.보좌관 회의는 3주내내 한일관계를 의제로 논의했던 셈이다. '한일관계 관련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한 뒤인 26일에도 대통령은 관계장관전략회의를 주재, 후속조치를 점검했다.

대통령의 글은 이처럼 외교관련 부처 및 청와대 참모진, 그리고 관계 전문가와의 계속된 토론 속에서 나왔다. 국민들에게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대통령의 글'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지만 그 내용은 철저하게 외교관련 부처 및 참모진과의 토론의 결과였다.

2. 진실과 혼을 담은 대국민보고서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수임 받은 대통령은 무한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민이 관심과 우려를 갖고 있는 사안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국민적 이해를 구하거나, 때로는 국민의 협력을 호소하는 것은 국가지도자의 당연한 의무다. 다른 나라의 지도자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일관계에 대한 '대통령의 글' 역시 마찬가지다. 연례적이고 의례적인 사안이 아니라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연일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상황이라면, 그만큼 심각한 문제라면 대통령이 이에 대한 확고한 원칙과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민들 역시 중차대한 국가적 사안에 대해 이후 상황 및 미래의 전망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어 할 때가 있다. '대통령의 글'은 그 당연한 의무에 충실하고자 했던 고뇌의 산물이다.

보기에 따라선 외교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글'이 생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한편의 글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다. 외교관련 부처 및 참모진과 고민과 토론을 거듭했고, 정책방향과 기조를 공유한 뒤 그 생각을 국민들에게 표현했다. 글의 내용 또한 17일 NSC 상임위원회가 발표한 성명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NSC 성명과 차이가 있다면 대통령의 '진솔한 육성과 혼'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3. 반드시 지켜야 할 수준의 원칙

혹자는 대통령이 최후의 조정자로 한 발 물러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뭔가 여지를 남겨 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내세웠던 원칙을 경우에 따라 후퇴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말을 전도시켜선 안 된다. 대통령은 결코 흥정할 수 없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원칙을 언급했을 뿐이다.

그 한 축은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대응이다. 독도문제, 교과서 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 그것이다. 또 한 축은 한일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되 현안문제에 대해선 일회성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의지를 갖고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감정적 대응에 대한 경계와 자제의 호소다. 대통령은 "일본 국민 전체를 불신하고 적대시해서는 안 되며…냉정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할 것"을 당부했다. "끈기와 인내심을 갖고 대응할 것"과 "멀리 내다보고 전략적으로 대응할 것"도 요청했다.

이들 원칙은 한일관계에 대한 대통령의 진정을 숨김없이 반영하고 있다. 퇴행적 움직임에 대해선 끈기와 인내, 전략적 사고를 갖고 대응하되, 최대한 감정은 절제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뒤틀린 현재'는 극복하되, 눈은 '화해와 협력의 미래'로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원칙이 어떻게 상황과 조건에 따라 버리고 후퇴할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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