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 세 남녀…구원은 어디서 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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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생존자
이창래 지음, 나중길 옮김
RHK, 664쪽, 1만5800원

살아 있다는 게 꼭 축복인 것은 아니다. 목숨과 바꾼 삶은 때론 죽음의 무게만큼 우리들을 짓누르곤 한다. 살아남는다는 건 어찌 보면 양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견디고 이겨낸 승리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가시밭길을 헤쳐오며 온몸에 생긴 상처를 끌어안은 아픔도 있다. 이른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한국전쟁의 한가운데 ‘새로운 희망 고아원’에서 만난 전쟁고아인 준과 미군 병사 헥터, 목사의 아내인 실비는 모두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탄성의 한계를 넘어서 망가진 용수철처럼 다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전쟁고아인 준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엄마와 언니, 쌍둥이 동생 둘과 피난길에 오른다. 아버지는 인민군의 손에 죽고, 오빠는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다.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길에 엄마와 언니, 동생 모두 목숨을 잃는다. 모진 목숨을 부지한 준은 욕망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무서운 아이가 된다.

 미군 병사인 헥터는 자신 때문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한국전쟁에 참전한다. 숱한 죽음과 전쟁 포로에 대한 학대를 겪은 그는 전사자 처리 부대에 자원하고, 나중에는 고아원에서 온갖 잡일을 맡는다. 마치 참회를 하듯, 자신을 내던지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고아원을 맡은 목사의 아내인 실비. 신앙심이 깊었던 부모와 함께 각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그는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이 부모님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모습을 보곤 삶의 의지를 놓아 버린다.

 이 소설은 상처받은 세 명의 주인공이 비틀린 욕망에 휘둘린 채 서로 난도질하고 종국에는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풀어낸다. 미국 뉴욕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며 중년이 된 준이 사라진 아들을 찾아 나서는 여정 속에 과거와 현재 속의 세 사람은 만났다 헤어지고 겹쳐지며, 꼬인 실타래 같은 이들의 운명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낸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 잠식돼 가는 주인공들의 삶은 책의 원제인 ‘항복한 사람들(The surrendered)’의 모습 그대로다. 감정을 분출하지 않는 작가의 건조한 문체는 전쟁의 참혹함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 오히려 담담하게 읽기 힘들 정도다. 그럼에도 작가는 끝까지 구원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놓지 않는다.

 한국계 미국 작가로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이자,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이름을 올린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소설은 아버지와 삼촌이 한국전쟁 당시 겪었던 일에서 시작됐지만 집단갈등이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것”이라고 밝혔다. 2011년 평화증진에 기여한 문학작품에 수여하는 데이턴(DayTon) 문예 평화상을 받았으며 2011년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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