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과 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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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신문에 나는 영화 광고를 보고 시세를 점칠 수 있다. 물론 계란이 먼저냐, 병아리가 먼저냐 하는 수수께끼 그대로, 영화 제작자나 수입 업자들이 시세를 조작하는지, 시세가 영화가의 방향을 유도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지난 수년동안만을 치다시피 하던 소위 시대물이 한물 간 것 같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없으면, 과거 속에서 현실과 엇비슷한 소재를 찾아, 은근한 비유와 암시를 담아 내는 것이 편리할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홍수와 같이 쏟아져 나오던 시대물의 대부분은 현실과는 아랑곳이 없는 잡물로서, 자칫하면 과거에의 복고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데 그치는 것이었다. 현실에 대한 동찰이 아픈 듯한 것이 많았다. 현실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더 큰 지혜와 용기로써 그 현실과 대결해야 하는 것. 시대물의 후퇴는 경사스럽다.
시대물과 함께, 천편일률의 배역으로 된 억지 「코미디」도 슬그머니 후퇴한 듯이 보이는 것도 기쁜 일. 그러나 시대물과 억지 「코미디」의 뒷자리를 차지한 것이 청춘물과는 좀 다른 순정, 순애물이라면 좀 서글프지 않은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있고,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고, 애끊는 경수가 굽이치는 애상의 명화들이 쏟아져 나올 기세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잘되면 관중들에게 흐뭇한 감동을 줄 수 있고 잘못돼도 무해무득한 오락물로 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인생을 순정이란 극히 허술한 안목으로 보고 대하려 해도는 문학 소녀가 속출할 위험이 있다.
순정물의 출현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간첩, 살인, 범죄 따위의 엽기물의 장수와 성행이다. 인간의 잔혹만으론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새가 등장하고 동물들이 산채로 먹고 먹히고 하는 동물 활극이 등장하게끔 됐다. 이제 겨우 007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 방화가 그 경지까지 가려면, 앞으로 4, 5년은 더 엽기의 향연을 베풀어 받아야할 것 같다. 이러다가 결국 어떻게 될까. 외화와 「필름」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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