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문화인] 지허 선암사 주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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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대자연이 우리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 차(茶)다.' 지허 스님은 이렇게 당당히 말한다. 그분은 50여년 동안 우리 나라의 자생차를 기르고 보존하고 직접 차를 덖으며 터득한 차의 덕성을 우리에게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강우방.문화재위원)

"'서편제' '춘향뎐' '취화선' 등 우리 문화의 걸쭉한 대목을 담아보고자 했던 영화들이 모두 지허 스님이 만든 우리 전통차의 그윽한 다향(茶香) 속에서 영감을 얻게 된 것들이다."(임권택.영화감독)

위와 같은 추천사와 함께 제작 총감독은 임권택 감독이, 그림은 '취화선'에서 장승업 대역으로 출연했던 한국화가 김선두, 표지디자인은 그 분야에서 명성을 지닌 안상수씨 등이 맡은 한 권의 책이 나왔다.

김영사가 최근 펴낸 '지허 스님의 차(茶)'. 열네살에 순천 선암사에 출가하여 반세기 이상 다각(茶角.절에서 차를 가꾸고 만들며 다례를 올리는 등 차에 대한 일체의 일을 맡는 사람)의 소임을 맡아온 선암사 주지 지허 스님이 2천년 전통의 한국자생차와 차문화의 참모습을 담은 책이다.

그 스님으로부터 차공양을 받으며 그윽한 우리의 전통혼에 사로잡힌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들이 평생 산중에서만 산 스님의 책 제작을 돕고 나선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정신적인 과정의 중심에 늘 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는 인간으로 하여금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음을 스스로 바라보게 하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지혜를 더 많이 얻게 했습니다. 조상들은 차를 마시면서 학문과 예술창작과 구도(求道)를 했으며 각자의 정신 영역에서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누며 고결한 융화를 이뤘습니다. 그 좋은 예가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그리고 초의선사의 만남이었지요. 그리고 지금도 목숨 걸고 고행정진하는 선원에는 반드시 차밭이 있습니다."

'선과 차는 같음(禪茶一如)'에서 인가. 지허 스님은 10여년 전부터 선암사에서 '산중다담회'를 열어 차를 나누며, 차의 생리를 빌려 불교의 선적 세계를 깨우치기 시작했다.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 여는 산중다담회에는 항시 전국에서 50여명의 수강생이 모인다. 그 중에서는 노르웨이 대사 등 외국인들과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사회 각계의 인사, 그리고 문화예술인들도 포함돼 있다.

평생 좌선과 차 재배와 제조에서 터득한 깨달음, 불법의 세계를 '사회 환원'차원에서 중생들에게 전하기 위해 산중다담회를 열고 있는 것이다

"좋은 차를 만들고 제대로 음미하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사람이란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아낄 것을 아끼며 기다릴 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와 차나무가 분별할 수 없이 하나가 되면 겉모양만 보아도 찻잎의 질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차는 백제시대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들어와 전라도 일대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비록 인도나 중국에서 들어온 차나무라 할지라도 이 땅의 기후, 토질 및 우리 삶의 정서에 맞게 적응하면서 이 땅의 토종 산물이자 문화의 명품이 됐다.

한국 전통차는 완전 야생의 차나무에서 난 잎을 따 일일이 손으로 비비고 덖어서 만든 것으로 데쳐서 말린 일본의 녹차나 발효시킨 중국의 차와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의 전통차와 다도가 있는데도 일본의 녹차가 우리의 전통차 구실을 하고 그들의 형식에 얽매인 다도가 우리 전통 다도인양 행세하고 있어 억장이 무너져 스님은 이 책을 내게 됐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 책의 특장은 무엇보다 '좋은 차, 좋은 인간과 삶' 등으로 차와 더불어 삶의 진리를 쉽게 설파하고 있는 데 있다.

"다도는 차라는 물질을 통해 우리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참선은 마음이라는 정신을 통하여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와 선은 외형상으론 다르지만 차를 잘 음미한다는 것은 곧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도에서의 차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마음인 것이지요. 우리의 근본적인 자아의 뿌리를 찾는 구도행위에 있어서 차와 선은 같다는 것이지요."

근대 선승 열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지허 스님은 젊은 시절 전국의 선원과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구도 행각을 벌였다. 그리고 지금도 좌선은 기본이라며 하루 4~6시간씩 화두를 잡고 참선하고 있다.

물론 차밭에서 일하든지 걷든지 눕든지 모든 일상에서도 스승 선곡 스님이 내려준 화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를 평생 붙잡고 있다. 그래 감히 질문을 드렸다. '모든 법이 결국 하나로 돌아가는 곳, 그곳이 대체 어디입니까?'

"지금 보세요. 문 창호지가 훤하게 밝아오고 뒷산에서 새들이 울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마음은 지금 저 창호지와 새소리에 있습니다. 달을 보면 달에 있고 물을 보면 물에 그곳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버리고, 즉 무아지경에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그 자연 하나하나에 온전한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내친 김에 하나 더 여쭸다. '애증이 가득찬 마음으로 세상살이가 고통스럽습니다. 그 고통 내려놓을 방편은 없을까요?'

"아픔을 아픔 자체로 처절하게 받아들이세요. 곧 숨넘어 갈 듯한 고통을 절실하게 체험하지 않고서 깨달은 자들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런 고통 후에야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통을 준 그 계기로부터 마음을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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