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여유를] 3. 잡담을 즐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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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우리나라 성인들은 지난 한해 동안 그 비싼 위스키를 한 명당 두 병씩 마셨다고 한다. 폭탄주 때문이다. 맥주잔에 위스키잔을 넣어 마시는 폭탄주는 이제 한국 남성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조제방법도 변신과 합체를 거듭해 이젠 거의 행위예술의 수준이다.

폭탄주는 왜 마실까? '빨리' 취하기 위해서다. 빨리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폭탄주와 폼 잡고 천천히 마시는 포도주 한잔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럼 왜 빨리 취하려고 할까?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포도주의 경우 기분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나 사랑하는 이가 함께 마신다. 함께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빨리 취하지 않아도 좋다. 폭탄주의 경우는 어떤가.

별로 할 이야기도 없는데 맨 정신으로 멀뚱멀뚱 서로 얼굴만 바라보자니 너무 민망스러워 폭탄주를 마신다.알코올의 힘이라도 빌려 상대방이 흐릿해져야 썰렁한 음담패설이라도 가능해진다. 맨 정신으로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회는 살벌한 사회다.

거리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대부분을 '왜 째려 봐'하는 말로 시작하는 이 사회는 뭔가 정상이 아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술자리에서조차 폭탄주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상대방을 바라볼 수 없는 우리는 아주 심각한 정신병리학적 질환을 앓고 있다.

자폐증이란 정신질환이다. 도대체 남과 대화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에만 빠져드는 아주 심각한 증세다. 증상이 매우 다양한 자폐증환자가 공통적으로 보이는 증상이 있다. 절대 눈을 맞추지 않는다. 눈맞추기는 관심을 공유하려는 행동이다.

눈이 마주치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눈을 마주치기가 무서워 폭탄주를 돌려야 하는 한국의 중년 남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폭탄주를 돌리는 것은 자폐증의 변형된 형태다.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노래하지만 각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그 다음날 '필름이 끊긴' 이야기를 서로 자랑스럽게 나누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서로 술을 함께 마셨다는 사실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폐증 치료의 첫 걸음은 정서적인 교류를 통한 눈 마주치기다. 필름 끊긴 이야기나 하면서 정서가 교류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업무 이외에도 서로 나눌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한다. 회사 내 동호회 모임이 활성화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맨 정신으로 서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느냐에 따라 잘 될 회사와 망할 회사는 구분된다.

직원들끼리의 즐거운 이야기를 '잡담'으로나 여기는 상사는 빨리 회사를 그만 둬야 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폭탄주를 잘 돌려야 리더십이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리더십이 아니라 자폐증상이 있을 뿐이다.

김정운 명지대 여가정보학과 교수(문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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