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고구려에 열광하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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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구려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고구려는 발해와 더불어 우리에게 오랫동안 잊혀진 역사였다. 고구려가 잊혀졌던 주된 이유는 고구려의 활동무대가 오늘의 우리와 달리 만주와 북한 나아가 동몽골(東蒙古)의 초원과 러시아의 연해주(沿海洲)를 포함한 광활한 대륙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오랫동안 잊혀졌던 고구려가 최근에 이르러 우리에게 다시 다가오고 있다. 한.중 수교 이후 만주여행이 자유로워지자 고구려의 건국지인 환인(桓仁)의 오녀산성과 집안(集安)의 국내성, 광개토대왕비, 벽화고분들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고구려는 우리와 보다 가깝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제국(帝國)으로 웅비한 이후의 중심지인 평양이 가깝고도 먼 땅이었기에 그 제국의 크기와 높이 및 문화의 깊이가 역사적 실체로 다가오지 않은 채 고구려는 여전히 신화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 동안 필자도 역동적인 고구려의 잊혀진 역사를 찾기 위해 대흥안령(大興安嶺)을 넘어 멀리 동몽골의 초원에서부터 연해주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 헤맸다.

*** 역동적인 고분벽화와 유물

그 결과 고구려의 서쪽 경계가 종래의 이해와 같이 요하선(遼河線)이 아니라 시라무렌과 대흥안령을 넘어 멀리 동몽골 일원까지임을 밝히기도 했으나, 정작 그 역사의 중심인 북녘 땅을 비껴가 항상 아쉬움과 허전함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다.

자연 나의 고구려사 연구도 미완의 그림처럼 한 편이 텅 빈 공백으로 남아 있었는데, 지난해 9월 북녘 땅을 방문해 그 심장부에 남겨진 대성산성.안학궁터.평양성 등 고구려 유적의 현장을 직접 보면서 북녘 학자들과 고구려 제국의 영화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하게 돼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북한 역사기행은 잃어버린 또 하나의 나를 찾는 여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그 역사 유적의 현장과 북한의 국보급 유물을 민화협과 중앙일보, SBS가 공동 주최한 '고구려!-평양에서 온 고분벽화와 유물' 특별기획전(강남 코엑스 3층 전시관)을 통해 서울에서도 직접 볼 수 있다니 고구려는 우리에게 한 발짝 더 성큼 다가오는 느낌이다.

조국의 영광을 위해 대륙을 질타하던 기마무사(騎馬武士)들의 웅혼한 기상과 고분벽화에 표현된 고구려의 예술, 그 찬란한 색채와 화려한 춤사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천신 앞에서 함께 음주가무를 하던 고구려인의 공동체 의식, 자유로움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서고 있다.

우리가 이처럼 고구려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는 분단이라는 민족사적 모순을 극복하고 통일 한국을 이루어 험난한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 나가야 할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그 동안 우리의 민족정서로 여겨진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은근과 끈기'만으로 이러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는 이보다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새로운 시대정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바다.

고구려가 새삼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들의 역사와 문화 속에 오늘의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갈 시대정신과 새로운 패러다임이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 고구려 유적과 유물의 서울 전시회는 시의적절한 것이며 관계학자들이 오랫동안 준비한 노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시회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이 고구려연구회가 다년간의 답사와 연구를 토대로 만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대의 고구려 영역도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고구려제국의 크기를 보며, 통일한국을 이루고 웅비할 우리 미래의 자화상을 읽게 된다.

*** 통일시대 미래의 자화상

북한에서도 잘 공개하지 않는 독자적인 연호가 새겨진 영강(永康)7년명 금동광배와 안학궁 복원 모형에선 수.당(隋.唐) 등 중원제국과 대등한 천하의식을 가진 고구려인의 긍지를 느끼며 오늘의 험난한 국제관계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이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된다.

또한 덕흥리고분.진파리고분 등 벽화고분의 화려한 색채와 해뚫음무늬 장식 금동관의 정교한 세공품에서는 고구려 문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으며 우리 속에 잠재된 높은 문화의식을 새롭게 조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徐榮洙(단국대 교수·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