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시간탐험 (42) - 마무리투수와 월드시리즈 괴담

중앙일보

입력

‘가을의 전설’ 월드시리즈는 야구팬들에게는 설레이는 전설일지 몰라도 마무리 투수들로서는 끔찍한 괴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진실은 2001 월드시리즈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한국형 핵잠수함’ 김병현도, ‘양키스의 수호신’ 리베라도 이번 월드시리즈를 역사상 가장 극적인 월드시리즈로 만드는데 바쳐진 희생양에 불과했다.

메이저리그 24년 동안 390 세이브나 기록했던 위대한 마무리투수 데니스 에커슬리 역시 괴담의 주인공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88년 오클랜드와 LA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커크 깁슨에게 허용한 극적인 역전 홈런의 순간은 그의 위대한 세이브기록 한켠에 쑥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현역 최고 마무리투수 중 하나인 트레버 호프만 역시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1999년에 무려 53세이브에 겨우 한번의 블로운 세이브만을 기록하며 팀을 월드시리즈까지 진출시켰고, 그 자신은 사이영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호프만.

그러나 월드시리즈의 신은 호프만을 제물삼아 스콧 브로셔스라는 영웅을 만들었다. 그 해 샌디에고와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나온 스콧 브로셔스의 역전 2점짜리 홈런은 시즌 내내 당당했던 호프만의 고개를 떨구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겨우 한번의 불운이었을 뿐이었다. 갈수록 마무리투수의 괴담은 더욱 심각해진다.

1996년, 100마일 강속구를 자랑했던 애틀랜타의 마무리 마크 월러스는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월드시리즈의 사나이’ 짐 레이리츠에게 동점 쓰리런홈런을 맞고 패배의 원흉으로 몰린바 있었다. 이듬해 33세이브를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그의 마무리경력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1998년 이후 월러스는 부상과 컨트롤 난조로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불투명한 선수생활을 지속해오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98년에 그의 어머니는 심장질환으로 앓기까지 하였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월러스가 올시즌에는 자신을 괴담 속 주인공으로 이끌었던 양키스 유니폼을 입고 활약했다는 사실.

‘와일드씽’ 미치 윌리엄스 역시 마무리투수의 월드시리즈 괴담에서 빠질 수 없는 주인공이다. 피칭 후 오른쪽으로 쓰러지는 독특한 투구폼과 ‘도 아니면 모’식의 투구스타일로 유명했던 좌완 미치 윌리엄스는 93년에 43세이브를 기록하며 ‘터프가이팀’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월드시리즈로 이끌었던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토론토와의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상대타자 조 카터에게 던진 단 한 개의 공은 그의 야구인생 자체를 바꿔버렸다. 카터에게 시리즈를 결정짓는 역전 3점 홈런을 맞은 뒤 그를 응원했던 많은 필리스 팬들은 냉정하게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를 욕하는 엄청난 양의 편지와 온갖 위협은 윌리엄스가 정상적인 선수생활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에 대한 위협이 얼마나 컸는지 신변보호를 위해 늘 총을 지니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다음 해 윌리엄스는 휴스턴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재기를 노렸으나 1승 4패 6세이브, 방어율 7.65라는 초라한 성적만을 남긴 채 불명예스럽게 은퇴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위의 월드시리즈 괴담도 8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마무리였던 도니 무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84-86년 동안에 68세이브를 기록했던 무어였지만 1986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 5차전의 9회에 터진 데이브 헨더슨의 홈런 한방은 비록 월드시리즈는 아니었지만 그의 인생 자체를 바꿔놓았다. 결국 그 홈런 한방으로 1승3패로 뒤지던 보스턴은 4승 3패로 단숨에 역전을 시키며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어는 홈런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후 단지 9개의 SV만을 추가한 채 88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해야만 했다. 사실 은퇴라기보다는 어느 팀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않았다는 편이 더 옳았다.

은퇴 후 무어는 팀의 첫번째 월드시리즈 진출을 날려버렸다는 자책감으로 알코올중독에 빠졌고 그의 가정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의 자책감은 결국 1989년에 그를 자살로 몰고 말았다. 그것은 메이저리그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닐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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