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여성들 화장 고민 풀어드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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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못보는 사람이 화장을 하겠다구?" 태평양 뷰티지원팀 권영희 팀장은 2001년 초 서울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미용강좌를 의뢰받고는 솔직히 걱정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눈이 어두운 사람들에게 화장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막막한 일이지만 화장법을 배운다고 이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게 사실이다.

색색의 립스틱과 아이섀도, 마스카라 등 이것저것을 챙기면서도 속으론'마사지나 해주고 오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팀원 세 명과 함께 2001년 2월 서울 송파구 삼전동 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을 찾아 여섯 명의 시각장애 여성을 만난 후 이런 생각은 씻은듯이 사라졌다. 난생 처음 메이크업을 배운다는 기대감에 부푼 그들이었다.

시각장애 여성들은 화장품 산업에서 철저히 소외돼왔다. 앞을 못본다는 이유로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까지 없으리라는 어처구니없는 선입견 때문이다. 하지만 권팀장은 "그들도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예쁘게 꾸미고 싶은 심리는 장애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태평양에서 최근 장애인용 점자가 병기된 50쪽짜리 '뷰티 가이드북'을 펴냈다. 2년 가까이 시각장애 여성들을 위한 미용강좌를 꾸준히 해오면서 교재의 필요성을 느껴 발간한 것이다. 이 책은 수강자가 아니더라도 필요한 사람들 누구에게나 무료로 배포할 예정이다.

책에는 기본적인 피부손질법뿐 아니라 입술화장이나 아이섀도 등 포인트 화장법까지 일러스트와 함께 상세히 담겨 있다.

뷰티지원팀 이희정씨는 "시각장애인들은 손 감각이 굉장히 발달했기 때문에 메이크업을 참 잘 한다"면서 "손가락으로 입술선을 만져가면서 입술을 능숙하게 그리는 걸 보고 놀랐다"고 털어놓았다.

예리한 손감각은 화장하는 데 뿐만 아니라 화장품을 고르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일반인들은 구별하기 쉽지 않지만 화장품 색상마다 질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뷰티지원팀 서영애씨는 "진한 색 립스틱일수록 만졌을 때 끈적이지 않는 느낌이 나고, 반대로 옅은 색은 끈적이는 경우가 많다. 펄이 많이 든 아이섀도는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조언했다.

시각장애 여성들이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역시 피부 표현이다.

뷰티지원팀 이송미씨는 "시각장애인들은 남들이 혐오감을 가질까봐 항상 깔끔하게 보이려고 애쓴다"면서 "깨끗한 피부를 위해 파운데이션 바르기 등에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뷰티 가이드북'에 소개된 화장법은 비장애 여성들을 위한 가이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손바닥을 이용한 화장법이 두드러진 차이점이다.

일반 여성들은 파운데이션을 얼굴 전체에 펴 바를 때 스펀지를 이용하고 손바닥을 쓰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시각장애 여성들은 손바닥에 파운데이션을 덜어 얼굴에 전체적으로 문지르면서 발라야 얼룩지는 걸 막을 수 있다. 클렌징을 할 때도 손바닥 전체를 사용한다.

이송미씨는 "가족들이 외부 노출을 꺼려 숨어 사는 시각장애인이 많다"면서 "이들이 미용강좌에 만족해 하는 덕분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우리가 직접 서비스할 수 있는 인원이 한정 돼 있어 늘 안타까웠다. 책 발간을 계기로 보다 많은 여성들이 미적 암흑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혜리 기자 <hyeree@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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