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산의 생명 판화읽기] 은행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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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흩뿌리고 나니 찬바람이 제법 매섭게 달려드는 군요. 거리의 나무는 바람에 제 몸을 맡긴 채 자신의 노란 외투를 벗고 있습니다.

벌거숭이 가지를 드러내면서 젊은날을 빛나게 했던 금빛 이파리를 미련없이 떨구고 있습니다. 이 세상 떨치고 가는 길 홀가분하다는 듯이 은행잎은 아스팔트 바닥을 빗질하고 있습니다.

길 건너 서로 마주보면서도 다가가 껴안을 수 없는 그녀가 안쓰러운 것일까요. 옷 벗은 가지엔 시린 이슬로 방울방울 눈물이 맺혀 있습니다.

이제 곧 새옷을 갈아 입겠죠. 가지 가지마다 하얀 눈꽃이 화사하게 피어 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햇살 좋은 아침 보랏빛 그림자로 그녀를 만날 것입니다.

늦가을 찬바람 부는 날에 열리는 자연의 풍경, 쓸쓸하다구요. 하지만 그것에서 웅크리고 있는 희망의 씨앗을 이미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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